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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876년 병자수호 조약 이후 일제는 침략의 마각을 드러내어 이권을 蚕食(천식)하고 횡포를 자행하더니 1895년 을미사변을 이르켜 친일역도들과 공모하여 무력으로 궁중을 난입하여 국모 민비를 시해하므로 전국민을 분노케하고 전국각지에서 항일의병이 봉기하였다. 1896년 1월 문경군 가은면 완장리 출신 운강 이강년 선생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항일의병 이르키니 선생은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집하여 훈련하는 한편 운강과 연합하여 토적에 앞장서니 동년 2월 1일 조령과 수안보에서 많은 왜적을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서기 1905년 로일전쟁의 승리로 더욱 오만해진 왜적은 매국역신들과 함모하여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니 전국민의 분노는 충천하였고 선생은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에서 수십회의 혈투로 많은 왜적을 토멸하였고 특히 1907년 8월 3일의 갈펼대첩과 9월 27일의 죽령전투에서는 많은 왜병을 살육하여 의병사에 길이 빛날 공훈을 세웠다. 1908년 6월 4일 충청도 청풍에서 왜적의 기습을 받아 많은 장졸이 전사하고 왜적에 생포되니 의병들은 사기가 떨어져 각기 산중으로 분산하게 되니 선생은 통한의 눈물을 삼키며 이대연의 아들 승재 긍재와 한양이 최경호 최민호 등과 부단이 연락을 취하고 복수와 구국활동에 몰두하였다. 선생은 용력이 뛰어나 조령관문 근처의 절벽길에서 왜적이 무장없이 오는 것을 지나쳤다가 뒤에서 밀어부쳐 떨어뜨려 몰사시킨 일도 있다. 1910년 경술국치후에는 아들 경달 경천을 데리고 괴산군 연풍면 적석리 백미산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