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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申采浩, 1880~1936)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충남 대덕 출신이나 낭성면 귀래리에서 성장하였다. 호는 단재(丹齋) 일편단생(一片月生), 필명으로 무애생(無涯生) 등을 사용하였다.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항일 언론투쟁을 펼쳤고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1910년 망명하여 연해주와 상해 만주에서 독립운동과 역사연구를 병행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1923년 창조파의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기초하였고, 무정부주의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후대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