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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다. 미래 동만과 북만 일대를 무대로 항일투쟁에 정신만진하며 혁명이론을 궁구력행하되 때로 대종원부경 등 200여 편의 논술을 저작하였고 혁명투사를 연성하려고 건원학원 등 10여개의 학교를 개설하셨다. 또 항일독립운동의 군량책으로 안도현 구원에다 농장을 개척 운영하되 다복식 농촌주의 정책을 펴셨고 때로는 독립운동단체인 대진단을 결성하여 군장으로 의려를 진작하면서 두만강 연안과 훈춘 일대에서 일군을 섬박하기도 하셨고 누차에 걸쳐 일제에 체포되어 뇌옥의 고난을 겪으셨다. 37세에 이르러 모우회를 조직하고 새바람 잡지를 간행하였으며 41세에는 만주에 산재하던 독립투쟁단체들을 규합하려고 조선혁명 지도처를 결성 주도하셨는데 북만에 창궐하고 있던 조선공산당의 시훼로 1933년 3월 24일 만주 팔도하자 어복촌에서 참해당하였으니 향년 45세로 순국하셨다. 선생은 일로 해박한 석학이요 의연한 혁명이론가이면서 열렬한 독립투사이면서 또한 고원한 이상을 품으신 스승이셨다. 오매불망하시던 조국 광복을 못 보시고 순열하시어 만주황야에 촉루고혼되심이 애닲으나 영전미침의 길이 없다가 1964년에 문하생과 총진들이 회집하여 선생님 불명의 원공을 기리고자 소래 선생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유저를 심구모집하여 소래집 상하권을 발간하였고 외솔회에서는 나라사랑 24호로 김중건 특집호를 간행하였으며 1977년 12월 29일에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포상받으셨다. 1983년 계해 10월 16일 연당 김지남 근찬 1995년 을해 12월 6일 이건 효계 김홍집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