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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조상께서 물려주신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이 무참히 짓밟혔으며 우리 민족은 국권을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였다. 이에 우리 민족은 국권회복을 위해 각 방면으로 투쟁하던 중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인산일을 기하여 손병희등 33인이 주도하는 독립만세운동이 화산같이 촉발하여 전국으로 확산하였다. 이 때 봉선사 승려인 김성암이 평소 뜻을 같이 하는 이순재, 강완수, 김석로에게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할 것을 결정하고 있으니 우리 조선도 일제에 대한 항거를 계속하여 자주독립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아래 서울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하고 우리도 항일만세 운동을 벌여야 한 다는 데 합의하였다. 그들은 우선 봉선사 서기실에대 비밀리에 조선독립단임시사무소를 차리고 등사 판을 이용하여 3월 30일 광릉내 주재소앞에서 만세운동을 벌릴 계획이니 모두 나오라는 요지의 유인물 200매를 만들어 29일 밤 9시부터 새벽 5시까지 진벌리등 4개 동리에 배포하였다. 3월 30일 주재소 앞 광릉천변에는 약 1,0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김성암등 무수한 인원이 일경에게 체포되니 이것이 이 지역의 제1차 만세운동이다. 한편 봉선사에서 보낸 격문을 본 접동리의 이재일은 이 사실을 김순만등 동리 주민에게 알리어 3월 31일 역시 광릉천 자갈밭에서 약 100여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이재일, 최대봉, 박석몽, 최대복, 유희상, 이흥록, 최영갑, 양삼돌등 주민이 다수 체포되니 이것이 이 지역의 제2차 만세운동이다. 이 밖에 금곡리에서도 13명의 청년이 주동이 되어 400여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었다. 이중 제1차사건으로 체포된 이순재는 1년 6얼, 김석로는 1년, 김성암, 장완수는 8월의 고법판결을 받았는데 특히 이순재는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는 등 이른 바 수형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3년의 옥고를 치렀고, 제2차 사건으로 체포된 이재일은 징역 1년, 양삼돌등 6인은 징역 6개월 등의 형을 받았다. 이상의 기록은 당시의 재판판결문과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한것이니와 어쩨 그 어른들의 충정과 고통스러움이야 만분의 1인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제 일제가 물러간 지 반세게 그동안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어른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고 있었다. 이제라도 그 빛나는 애국충정을 되새기고 아울러 후손들에게 거룩한 귀감으로 남겨 주기 위하여 전 시민의 이름으로 이 비를 세워 높으신 충혼에 조금이라도 보답코자 한다. 서기 1999년 5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