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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하시였으며 부모님께 순종하여 생업에 종사하시던 중 1907년 2월 중순 이 고장에도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자 선고께서는 전주이씨의 종손 계승권자임에도 온 가족을 설득하여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시고 교회일에 앞장서 용진교회 개척에 선구적 역할을 다하셨다. 1911년에는 선비이신 정요한나씨와 결혼하시고 1914년 6월에는 집사에 이어 영수를 거쳐 1917년 2월 중순에는 장로장립을 받으셨다. 더욱 애국심이 남보다 투철하시여 1919년 3월 1일 거국적으로 봉기한 만세의거때는 교회를 주축으로 분연히 앞장서 일제에 항거한 까닭으로 왜경에 체포 구금되어 1년 6월의 형(刑)을 언도받고 서대문 원산 함흥 등지의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셨다. 출옥 후는 더욱 교회와 지역사회 개발에 이바지하셨으니 본 교회 건축시는 밭 570평을 봉헌하여 건축비에 충당케하셨고 특히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장로님의 따사로운 손길과 정성어린 기도로 사귀병 환자를 고침으로 인하여 인근 부락에도 교회를 설립케 하시였으니 1927년 19일에는 양수리교회를 1929년 5월 20일에는 미사촌교회를 동년 10월 21일에는 금남교회를 1934년에는 삼봉리교회를 각각 설립하시였다. 또한 종손으로서의 본분도 다 하시였으니 만행산 주권분쟁시는 서울지방법원에서 그 근원적 증언으로 전주이씨의 종산임을 입증함으로써 주권을 인정 승소판결을 받게 하시였다. 그리고 본 교회는 물론 새로 개척한 인근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시였으니 이는 모두 10리에서 30여리에 뱃길까지 겸한 험준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노구를 이끄시며 춘하추동 모진 하니 바람이 나눈 비 그리고 삼복더위 새벽의 참이슬 칠흑같은 어두움 밤길을 가리지 않으시고 도보로 오직 주의 복음 전파만을 전념하시다. 1948년 정월 28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상은 떠나셨으나 선고께서 이 나라와 지역사회에 끼친 그 위대한 그리스도의 복음화 행적은 산역사로 길이 길이 빛날 겄입니다. 정부에서는 기미삼일만세 의거때의 그 탁월한 애국충정을 높이 평가 인정하여 1968년 3월 1일을 기해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주후 1984년 광복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