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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나라가 일제에 병탄되고 무단정치가 심해지자 국권회복에 신명을 바치던 많은 항일의병과 애국지사들은 국외망명길에 올랐다. 공도 부모와 함께 1919년 2월 만주국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하여 간도 동명학교에 재학중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22년 간도지방 독립운동단체인 통의부가 결성되자 결연히 투신하여 유하현 지방조직을 담당하고 재무책으로 활동했으며 1925년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여 정의부로 확대되자 계속 재무책을 맡아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계속하였다. 1928년 의용군 군자금 조달활동중 일본영사관 경찰에 피체되어 같은 해 5월 7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법죄처벌로 징역2년형을 언도받고 옥중 1년6월 감형되어 1929년 11월 출옥한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30년(일자미상) 만주로 다시 망명하여 점검으로 개명하여 신분을 은폐하고 영국 구 시가영세가2본정에서 연초소매상을 경영하면서 은밀히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이역만리 만주에서 20여년 항일 독립투쟁을 하다가 공은 국내로 잠입하여 김포군 양촌면 운리 376번지에서 은둔생활중 8.15광복을 맞았다. 공은 독립투쟁에 젊음을 바쳤으나 남북이 통일된 모습을 못보고 1949년 12월 13일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나니 애통하도다. 공은 슬하에 2남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경동이고 차남은 경원이고 장녀는 경연 차녀는 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