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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이 죽을 때까지 독립을 도와 이루게 할 줄로 확신하노라." - 이동휘 선생 1873년 함경도에서 출생한 이동휘 선생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육영학교를 개교(1904년)하여 교육 진흥 운동에 매진하였다. 이후 고종이 '보창학교(普昌學校)'라는 교명을 하사(1905년)하고 학교 재정을 지원하면서 강화 지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보창학교는 초등, 고등 소학과, 보통과, 여학과, 사범과, 어학(일어과, 영어과) 과정을 신설하여 민족교육 운영에 헌신하였다. 또한 군사 훈련을 꾸준히 실시하여 민족 운동가를 배출하기 위한 강한 의지를 담아냈다. 실제 보창학교를 졸업한 학생 대부분은 의병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활동을 하였다. 이후 강화군 내에 70여 개, 전국에 170여개의 보창지교를 설립하며 민족 계몽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915년 일제의 탄압에 의해 폐교될 떄까지 강화 지역의 의무 교육안을 마련하고,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하며 강화지역의 교육을 선도하였다. 일제강점기 교육의 중심 역할을 한 보창학교는 이종호가 설립한 보성학고, 이준이 설립한 보광학교와 함께 '교육의 삼보(三寶)'라 불리며 강화 근대 교육을 이끌었다. 보창학교 터는 강화교육지원청 미래교육지원센터로, 현재까지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며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