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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인 이동휘 지홍윤 김동수 유명규과 강화 전등사에서 의거 밀의를 하다. 이동휘는 체포되고 기외 동료는 구국을 다짐한 후 8월 9일 부하를 인솔하여 무기고를 파괴하고 이를 제지하는 대장 민완식과 민영락을 축출하며 친일파 일진회 간부 군수 정경수를 동문 밖에서 처단한 후 뜻있는 강화도 내의 의혈청년들에게 무기를 나눠주고 본도를 완전 장악 갑곶에다 작전 지휘 본부를 설치하여 일병과 치열한 전투 중 적병 1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었다. 그 이튿날 11일 패한 일군은 서울로부터 증원부대를 지원받어 기관총 2문등 화기 강세에 몰려 패하게 되자 김동수는 전사하고 지홍윤은 서해로 떠났으며 열사께서도 강화를 내어주고 부하 60여 명을 인솔 경기도 장단 덕물포로 후퇴한 후 의병을 창의한다는 기치를 올리고 의병을 모집 대한창의○○군이라 명칭하고 열사를 의병장으로 추대 아장에는 제갈윤신을 선봉장에는 연기칠을 임명하여 모든 의병에게 직책을 정한 후 일본정부에 정식선전포고 격문을 발송하고 경기도 장단을 선두로 삭녕 적성 양주 이천 포천 마전 강원도 철원 등지에서 일병과 접전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였으며 열사는 이인영 허위 강기동 의병장과 전국 8도 의병진을 결합 형성 구축한 후 일제히 서울을 탈환하고저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으나 일군의 화기 및 증원부대에 대패전을 당하여 남은 부하를 인솔하고 수시로 일병과 지구전을 감행하였으며 열사는 본래 군인 출신으로 군율이 엄정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아 도처에서 민심을 얻어 지방민의 비호로 적을 무수히 무찔러 전과를 올리는 한편 공사를 구명히 처리하는데 어느날 삭녕 등지로 행군할 시 아들 대호가 찾아와 가옥은 일병에게 방화당하고 모친은 병석에 누워 생계가 모연함을 고하였으나 꾸짖고 조금도 돌보지 않았다. 열사의 부하 한 사람이 몰래 아들에게 금 50원을 주었는데 그것을 알고 열사는 크게 노하며 그 돈은 군자금이다 누가 감히 사사로이 쓸 수 있겠는가 하고 그 돈을 아들로부터 도로 환수하였다. 1908년 11월 21일 강기동 의병진과 연합 200여 명을 영솔하여 포천군 송우 등지에서 일헌병과 교전 중 2명을 사살하였으며 동년 12월에 강원도 철원 등지에서 헌병 및 보조원 5명을 사살 등 무기를 탈획 친일파 장단군수 및 포천면장 외 수 십 명을 의병 군율에 의거 처단하고 연적격전으로 대전과를 올리었다. 그리하여 아우 선봉장 연기칠은 전사하고 부하 이기백은 체포 구금되었으며 부친 연성한도 체포 피살되는 비애를 당하셨다. 열사께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부하 현학인의 친형 현학용으로서 일헌병 보조원 최영복과 내통하여 무기 및 실탄을 구입 황해도 이진용 부대와 합류 구월산 지리산 등지를 은거지로 해주 연백 안변 및 전국을 누비며 일병을 살상하여 괴롭히다가 일병에게 체포되어 비참하게도 순국하시었다. 이로써 정부에서는 열사에게 기 공훈으로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하였고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 무후선열 제단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유국무가정신 그대로 열사의 대손이 끊기고 구국열사의 말로는 이러한 것인가 새삼 느끼어 옷깃을 여미고 후세에 의표를 삼고자 여기 편석에 새겨 기리노라. 서기 1988년 무진 11월 일 수 의병장 연기우 공적비 건립위원장 송지영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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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는 곡산 연씨로 휘는 기우이고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에서 생장하시었다. 건장한 체격으로 지용이 겸비하여 남달리 의협심이 강하여 국가에 간성이 되고자 한국진위대에 입대하여 강화파견대 부교로 복무하던 중 서기 1907년 8월에 일제 책동으로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열사는 이에 통분하고 오직 구국일념의 정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