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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어장터 3·1만세운동의 내용과 역사적 의의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한민족은 국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계양주민들도 3월 24일 오후 2시경 오류리 심혁성의 주도하에 장기리 황어장터 장날을 이용하여 6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구한국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인천지역에서 전개된 가장 대규모적인 만세운동이었으므로 당황한 일제는 심혁성을 체포하는 한편 이의 진압에 적극 나섰다. 이에 장기리의 임성춘 등 주 민 200여명은 만세운동과 더불어 일제에 체포되어 가는 심혁성의 탈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부내 경찰관 주재소 일본순사는 칼을 빼어 휘둘러 선봉에 섰던 선주지리의 이은선을 즉사케 하고 윤해영에게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은선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계양주민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다남리의 이담(이은선 의 6촌)을 중심으로 통문을 돌려 주민들을 규합하여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자 하였다. 소식에 접한 주민 200여명이 밤 12시 계양면사무소 앞에 모였다. 이담, 최성옥, 전원순, 이공우 등 다남리, 이화리, 선주지리, 오류리, 장기리 주민들과 천도교인, 선주지리 기독교인, 일반 농민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성난 계양주민 100여명은 우 선 선주지리에 있는 면사무소 서기 이경응이 친일적인 혐의가 있다고 인정하고 그의 집으로 달려가 집을 파손하여 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아울러 친일자의 말로가 어떤가를 보여줌으로서 민족적 단결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또한 주민들을 억압 탄압하던 면사무소도 파괴하여 친일기관을 응징하고자 하였다.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계양주민 40여명은 3·1운동을 전개하였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심문을 당하였으며, 일부 인사들은 김포 등 타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결국 만세운동의 중심인물들은 1919년 10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11월 19일에 형량이 최종 결정되었다. 이담 징역 2년, 심혁성 징역 8월, 임성춘 징역 1년, 최성옥 징역 10월, 전원순 징역 10월 등이었다.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계양지역 주민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자긍심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천지역, 나아가 전국의 만세운동 전개에도 견인차 역할을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