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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 선생은 1899년 9월 25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강화군 강화읍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셨다. 3.1운동 당시 약관 20세의 청년으로 독립만세 대오에 앞장서시다가 일경 日警에 체포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르셨다. 옥중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석방 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쥬우오대학 중앙대학에서 수학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사상단체의 조직활동에 힘쓰셨다. 이때 사회주의에 심취하신 선생은 1923년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수료한 후 고국으로 돌아와 조선공산당 조직에 주도적 역할을 하셨으며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8년간의 옥고를 치루셨다. 해방 후 공산당을 청산하고 좌우합작운동에 투신 민주국가 건설에 적극 참여하셨으며 제헌의회 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에 진출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셨고 초대 농림부장관을 역임하셨다. 장관 재임 중 땅 없는 농민 소작농을 위해 토지개혁법안을 마련하여 실시코자 하는 등 계급조화(階級調和)의 모범을 보이셨다. 2대 국회에서 선생은 부의장으로서 전시 국회를 이끄셨으며 1952년 2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여 차점으로 낙선하였다.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근로 대중을 위한 혁신정당임을 표방하는 진보정당 進步黨 창당을 추진하며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 재도전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부정선거로 인하여 집권에는 실패했지만 리승만과 그 추증세력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선생으 도전으로 위협을 느낀 자유당 정권에 의해 날조된 간첩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구실로 1959년 7월 31일 전격적으로 처형당하셨다. 국민이 다함께 잘 사는 복지 국가를 건설하고 평화적 통일을 이루고자 심혈을 기울이시던 선생께서 가신 지 42년만인 2000년 6월 15일 남북의 지도자가 손을 마주잡고 평화적 통일과 민족의 화해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으니 이는 선생의 염원이 현실화되는 첫걸음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