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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죽는 편이 훨씬 낫다." - 군대 해산 직후 경기도 양평에서 만난 의병과의 인터뷰 프레드릭 멕켄지, 『한국의 비극 THE TRAGEDY OF KOREA』,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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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어나 나라를 되자! 신흥무관학교 1911년 6월 이회영 이동녕 이상룡이 세운 신흥강습소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서간도로 찾아오는 청년들이 늘어나자 1912년 7월 '신흥무관학교'로 새 출발했다. 1920년 8월까지 신흥무관학교는 3,500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봉오동 청산리대첩을 비롯해 일제에 맞선 전투 현장에는 언제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있었다. 그들은 조국광복을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서며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찾아 국경을 넘다 1919년 가을, 나는 만주에 있는 군관학교를 찾아가 독립군이 되기로 결심하고 몰래 압록강을 건넜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려고 하자 사람 들은 겨우 15살 밖에 안된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서 엉엉 울었다. 학교는 산 속에 있었으며 18개의 교실이 줄지어 있었다. 18살에서 30살까지 학생이 100명 가까이 입학하였다. 일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하여, 취침은 저녁 9시에 하였다. 우리들은 군대전술을 공부하고, 총기 훈련도 받았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할쏘냐? -김산·님 웨일즈, 「아리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