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page


333page

여심 주요섭 선생은 1902년 11월 24일 평양서 문밖의 신양리에서 주공삼목사님의 둘째 아들로(형은 주요한 시인) 태어나 1972년 11월 14일 이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은 일찌기 숭실중학 일본청산학원 대학을 수업하시고 중국 상해 호강대학 및 미국 스탠퍼드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으셨다. 선생은 1921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단편 '깨어진 항아리'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오신 후 50년간 단편 40여 편과 장편 10여 편을 남기셨다. 선생의 작품 세계는 초기의 저항의식과 중기의 휴머니즘 사상과 후기의 현실 고발 사상을 잘 그려낸 특출한 작가이셨다. 또한 선생은 투철한 애국애족 정신으로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루신 적도 있으시며 직선적이고 진실한 대학자이셨다. 선생은 여류 수필가 김자혜 여사와 결혼하시어 큰아들 북명, 둘째아들 동명과 딸 승희를 두셨고 그간 단편집 「북소리 둥둥」등 다수의 창작집을 가지셨다. 오늘 선생이 타계하신 지 12주기를 맞이하여 제자 후학 문인들이 정성으로 경기도 파주군 금촌 기독교 공원묘지에 선생의 문학비를 세우다. 1984년 4월 29일 여심 주요섭 선생 문학비 건립위원회 위원장 : 백철 / 부회장 : 전숙희, 조경희, 서정범 / 간사 : 유승규, 최진우, 진용우 / 문하생 김해성 짓고, 서강 정덕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