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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평양(平壤)에서 3.1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5월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 졸업생과 재학생들인 원보훈·김진경·김건형·이태서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신문사를 만들고 등사판『독립신문』을 발간·반포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7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그 뒤 중국 상하이[上海]의 호강대학(호江大學)에 재학중이던 1921년 12월 23일, 상하이[上海] 삼일예배당에서 유호학생회장 이강희의 사회로 재상해한인학생회가 개최되었을 때, 대한독립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최후의 일인까지 싸워야 한다는 취지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였다. 1925년 10월에도 상해한인유학생회·청년동맹회·삼일공학학우회(三一公學學友會), 그리고 상해소년회가 연합하여 프랑스조계 삼일리(三一里) 삼일당(三一堂)에서 연설회를 개최하였을 때에도 ‘민족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1926년 11월경 그 동안 분립되어 있던 상해의 한인유학생 단체들이 모두 해체되고 통일된 단체인 상해한인학우회가 창립되었을 때 운동부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어 1927년 3월경 개최된 상해한인청년회 창립총회에서도 집행위원에 선출되는 등 유학생·청년 단체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