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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주 목사는 꽃재교회의 2대, 4대, 10대 담임목사이자,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며,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정동에서 태어난 그는 1890년 자진하여 구한국 군대에 입대하여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겪었다. 1899년에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으나, 1902년 어린 자녀 둘을 전염병으로 모두 잃고 인생의 허무함을 깊이 체험하며 심한 고통에 빠졌다. 그 모든 죽음과 고통의 책임을 자신의 죄책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예수를 믿으면 무슨 고난을 당하든지 위로를 받고 안심이 된다'는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1903년 강한 확신과 더불어 그 해 4월 스크랜턴(W. B. Scranton)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해 가을에 군을 제대하여 전도사업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상동교회의 정식 교인이 된 그는 1904년에 장이 되었고, 그해 여름에는 권사가 되었다. 상동교회의 담임목사인 전덕기 목사가 청년학원을 설립하자 그곳의 체육담당 교사가 되었고, 1904년 공옥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1907년에는 신민회 활동을 하며 민족운동을 펼침과 동시에 4월에는 전도사 직첩을 받았다. 1911년 40이 넘은 나이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2년 과정을 마치고 1913년 3월 지방회에서 파송을 받아 왕십리교회(현 꽃재교회)에서 5년간 시무하였다. 1915년 4월 25일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18년 6월에는 손정도 목사 후임으로 정동교회로 파송 받았다. 1934년 3월 왕십리교회(현 꽃재교회)에서 은퇴하였고, 은퇴 후에는 수원지방의 남양교회에서 원로목사로 남아 교회를 돌보았다. 일제 말기 가중된 신사참배 강요와 태평양 전쟁으로 기독교와 민족의 시련이 극심하여 적지 않은 기독교 인사들이 변절해 갈 때에도 지조와 절개를 지켜 나갔다. 교회탄압에 맞서 꿋꿋이 투쟁하던 중 해방을 몇 해 앞둔 1942년 4월 21일 소천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꽃재교회는 그의 꽃재교회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빛나는 생애를 기려 그의 간절한 기도와 꿈이 서린 이 곳에 그의 업적을 선양하는 기념비를 세운다. 2017년 4월 20일 기독교대한감리회 꽃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