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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으로 자랐다. 그러나 그의 기개가 과감용맹하고 강직하매 학문과 더불어 무예를 익힘으로써 명장의 반열에 도전하였다.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1744년 공은 드디어 갑자 무과에 급제 훈련원 주부를 거쳐 어모장군 용양위 부호군이 되고 31세인 영조 22년에 병인 중시를 거쳐 근위장군 용양위 부호군 함종도호부사 갑산도호부사가 되었다. 공은 44세에 가선대부에 올라 충정감영 중군 김해부사 경상좌병사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됨에 백성을 위한 그의 선정은 그 평판과 명망이 하늘을 찔렀다. 46세인 신사년 공은 흥해(포항)부사로 부임 그곳에 근무당을 창건 그곳에서 젊은이들에게 문무의 기예를 닦게 하였다. 그런가하면 공은 백성의 삶을 두루 살펴 12개의 제방을 축조하고 수리시설을 확충함으로서 흉년의 기근에서 백성을 구하였다. 삶의 현장에서 백성들과 함께하며 그들 삶의 애환을 나누니 백성들로서는 더없는 광영이었다. 이같은 사실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자 수의어사는 이를 임금께 상소하였고 그로서 임금은 크게 감동하였다 하여 왕은 공을 평산도호부로 이직케 함과 동시에 그의 공을 높이 치하하고 널리 조선의 8도 관찰사들로 하여금 김영수의 본을 받도록 명하였다. 이에 관민들은 흥해 구제 기적비를 세워 공의 선정을 기리고져 청덕사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사당에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제사를 올렸다. 58세인 1773년 공은 호남 좌수 좌수영 수성 창설 사적비를 세우게 되었다. 1778년 정월 63세로 전라도 수군방어사 겸 제주목사가 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수재 예방을 위해 두 개의 간성을 쌓고 간월천에 보를 축조하였으며 조천석을 건립 지우제를 지내게 하는 등 백성의 안위를 돌봄에 가득한 정을 쏟았다. 이에 공이 제주목사를 사임하니 그곳 백성들은 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선정비를 세워 그의 청렴 공정성과 위엄성을 높이 찬양하였다. 1785년 공이 홍충도 병마절도사로 부임 청주산성을 수축 완성할 즈음 정조 9년 12월 3일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 왕은 특별히 교서를 내려 공을 크게 치하하면서 신임 통제사로서의 공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간절하게 피력하였는데 그 내용은 나라의 관리들이 부패무능하여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있으니 공이 과감한 개혁을 실행 백성을 잘 돌보라는 것이었다. 이는 현세에도 또 내세에도 영원토록 아로새겨 둘 일이다. 1786년 정조 10년 7월 1일 공이 통제영 임소에서 71세로 순직하시니 아뿔사 백성들은 하늘이 무너진 듯 통탄하였다. 이에 왕 또한 크게 상심하시고 다음과 같이 하명하셨다. 통제사 김영수의 선정이 구중 궁궐까지 전해지매 남녁의 걱정을 잊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도중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크게 슬프도다. 후임 통제사는 김통제사가 진작시킨 정사가 허사가 되지 않게 하라. 한편 통제영의 인사들은 공의 죽음을 크게 애도하여 통영 세병관에 타루비를 세우니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픔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회고컨대 덕행과 학문에 출중 선비의 추앙을 받는 무인이면서 서예에도 뛰어나 관덕정의 탐라 형승 방선문의 환선대 한산도의 제승당 등 일필휘지의 현판을 남긴 공의 흔적은 영영세세 자손의 긍지가 아닐 수 없다. 공의 배위는 정부인 어씨로 관향은 함종이다. 사징의 딸이요 증 참판 진한의 손녀며 첨 중추 영해 이광섭의 외손녀로 공보다 먼저 타계 공의 묘에 부장하였다. 무후하여 백부 3남 낙풍을 양자로 입적시켰는데 그는 칠원혐감 중화부사 함양부사를 지냈다. 후에 정부인 간성최씨를 맞아 5남을 두었으니 낙신 낙원 낙추 낙의 낙중 등이 그들이다. 이들 중 3남 낙원은 제주목사때 공을 도와 호종하였다. 함양부사 낙풍은 무후하여 정훈을 입적하였고 낙신은 상훈과 성훈 등 두 아들을 두었으며 낙원은 장훈 요훈 병훈을 두었으나 그 중 요훈은 숙부에게 입적되었다. 낙의는 무후였고 낙중은 태훈을 두었다. 그후 공에게는 많은 후손들이 있어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