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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항일학생운동(일명 노다이사건) 부산항일학생운동은 1940년 11월 23일 경남학도 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군사 훈련을 겸한 체육대회)에서 일본학교를 우승시키기 위해 민족차별적 심판을 한데 대한 불만이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11월 21, 22일에 열린 모의 야영전투훈련 기간중 심판장이었던 노다이는 조선인 학생에게 일부러 고된 산지를 우회시키고, 일본인 학생은 평지에서 전투 훈련을 시키는 등 편파적 훈련을 진행하였다. 또한 11월 23일 경남학도 전력 증강경기대회에서는 전년도 1회 우승교인 동래중학을 제치고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를 제일 먼저 입장시켰으며, 동래중학이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하면 트집을 잡아 재시함을 시키거나 반칙이라고 떼를 쓰는 등 악랄한 수법으로 성 적을 부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최종 종목인 무장행군경주에서는 우승 유력 학교인 부산2상을 일부러 가장 불리한 6코스에 배치시켰고, 부산2상이 1위로 달리자 반칙을 선언하여 결국 우승을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차별에 두 학교 학생들은 울분과 의분을 참지 못하여, 폐회식 마지막 식순인 일본 국기 하강식때 일본 국가 대신 우리의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고, "노다이 죽여라!", "왜놈 죽여라!"고 절규하였다. 1000여명의 양교생 들은 시위행진을 벌이고, 4, 5학년을 중심으로 약 400명의 학생들은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여 외등과 유리 창문을 모조리 깨어버렸다. 노다이사건은 불과 1일간의 항일투쟁이었으나 엄중한 일제의 보도 통제 속에서도 우리 학생들의 민족정기는 전국에 널리 메아리쳐 갔다. ■ 비밀결사운동 비밀결사 조직으로는 1910년 부산상업학교 학생 변상태. 최기택 등 6인이 결성한 대붕회 (大會)와 1915년 부산상업학교 재학생 오택과 박재혁 등 10여명이 결성한 구세단(救世團)으로 3·1독립운동의 전개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후 1940년에 일어났던 부산공설운동장에서의 부산항일학생운동(노다이 사건)의 영향으로 1942년 동래중학생들의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과 1944년 부산진보통 학교 졸업생들의 「순국당(殉國」 등 비밀결사가 태동되었다. 순국당은 학생, 사회인 등 구성원이 다양하고, 활동범위가 경남지역과 일본·만주 로까지 이어져 우리 민족의 저력을 과시하였다. ■ 조선청년독립당(朝鮮靑年獨立黨) 조선청년독립당은 노다이 사건때 퇴학당한 남기명과 동래중학 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서회로, 강령으로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를 내걸었다. 이 조직은 군사기밀을 내사하고 순국당 등과 연계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순국당 당원 차병곤이 체포되면서 발각되었다. ■ 순국당(殉國黨) 순국당은 1944년 5월 부산진보통학교 졸업생 차병곤·박정오·신정호 등 13명이 참가하여 결성되었으며, 강령으로 민족독립, 주권회복을 위하여 투쟁한다'를 내걸었다. 항일투쟁을 1·2·3·4차로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모두 만주로 가서 독립군에 합류하기로 결의하고 실행하다 당원 전원이 검거되었다. 행동목표 ① 고이소 총독 암살 ② 일군시설의 파괴 ③ 일본인 집단거주지(현재 광복동, 남포동)에 대한 방화 ④ 은행습격 ⑤ 공습시 산불 놓기 일제 말기 학생운동 민족지성을 표방한 학생들은 1919년 일본 동경유학생의 2·8독립선언에 이어 3·1독립운동과 같은 거대한 민족운동에 전위적인 역할과 식민교육이라는 학원 내의 모순에서 도전의 주체로 부상하여 농민·노동·여성운동 등 사회운동 등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0년대에는 조선학생회 발족을 시발로 학생조직 체가 만들어진 이후 6·10만세운동과 맹휴운동에 이어 광주학생운동으로 발전하였고, 1920년대 이후 항일운동은 노동운동과 아울러 청년학생들의 항일투쟁으로 급속히 성장. 강화되었다.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 학생들은 학원내 배속장교 배치 등 학원에 대한 사찰과 탄압이 가중되자 농촌계몽운동, 민족야학개설, 학생반전운동, 문화운동, 비밀 결사운동으로 학생운동을 이어오다가 1943년 5월 대규모 맹휴항쟁을 계기로 광복의 역군으로 참여하기 위해 무력항전을 계획하는 등 독립군적 성격을 띄면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