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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8월 19일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경암은 마침내 창의(倡義)할 결심을 하고 말하기를 “큰 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하늘을 머리에 얹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하루인들 살기를 바랄소냐”하며 군중의 의사를 물으니 호응하는 자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경암은 “창의의 명목은 큰 의를 펴자는 것이니, 어찌 병력의 많고 적음을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내 집 식구를 거느리고 내 대지팡이를 휘두르며 적을 대해 꾸짖고 죽어도 불가한 것은 아니다” 하고 바로 길을 떠나 선산(先山)에 가서 이별 인사를 고하고 돌아가는 즉시로 거사를 하려고 하였다. ... 13일에는 정운경과 둘이서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천·양구에 이르렀다. 앞에 적이 있고 비가 쏟아져 총을 쏠수 없어 나갈 수 없음을 말하였다. 서상렬은 혼자서 군사를 거느리고 떠나 낭천부로 들어갔다. 적의 공격을 받아 군사가 흩어지니, 여러 사람이 대진과 합세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듣지 않고 낭천으로 들어갔다가 복병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서상렬이 전사하던 날 함흥에 있는 어서각(御書閣)에 서리가 내려 눈과 같았으니, 이것이 경암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경암의 죽음이 알려지자 영호(嶺湖)의 사람들이 슬퍼하고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출처] 문화경제신문 - 화서학파 인물열전(154) - 경암 서상렬 선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