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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도철 자 성관 호 두남이며 조선왕대 14대 선조대왕의 9남 경창군 휘 주의 현손인 통정대부 검지중추부사 입향조 휘 정희의 현손으로 선조대왕 9대손이다...중략... 공은 1852년 2월 19일 제천 천남에서 출생하여 문무를 향리에서 갈고 닦았으며 연일정씨와 혼인 1남을 두었다. 1885년 제천향교 초대교장으로 구태를 일소하여 군민들이 공덕을 칭송하여 비를 세워주었다. 1893년 5월 영월영춘순무어사 7월 의금부도사 1895년 5월 조선군부 평양대장을 역임 동년 8월 20일 명성황후 시해와 기울어져가는 조선왕조의 왕권을 회복하고 친일세력을 몰아내고자 복수창의를 결의 동년 9월 6일 고종으로부터 '솔병내호궁성주토흉역대조선대군왕어' 이라는 밀지를 받아 10월 11일 밤 군호는 중심이라는 암호로 춘생문 의거를 일으켰으나, 반역자의 밀고로 전모가 드러나 친일세력의 모진 고문끝에 11월 15일 사형으로 순국하였으니 공의 나이 43세였다. 1896년 4월 왕명으로 복권되어 자헌대부 군부협변에 증직되고 충민공 시호를 받았다. 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고종편에 상세히 수록되어있다. 1901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국모시해 복수창의에 순국한 충민공과 제위의 추모를 위해 장충단사를 짓고 장례원에서 춘추대제불천위로 제향하였으나, 망국으로 제례는 중단되고 광복후에도 방치되다가 1988년부터 서울시에서 국모시해일인 10월 8일을 제향일로 정하고 을미사변과 춘생문의거에 순절한 선열을 장충단제로 기리고 있다. 공의 거사를 앞두고 낙향, 선산에 소초를 하고 형님들께 '이번 한양에 올라가면 생사를 가늠하기가 어려우니 만약 잘못되면 나를 두무동대곡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였다. 비장한 마음으로 상경하는 공의 벌걸음은 무겁고 처연하기 그지없었을것이다. 거사후 공이 부탁한 이곳 인좌에 안장되었다. '국모시해이후 백성의 분통한 마음은 사람이면 다 같을 것이다. 누군들 억울하여 개탄치 않겠는가 그래서 자연히 의기가 상합하여 대사를 일으킨것이다'라고 재판에서 당당히 밝힌 공의 충절은 태산처럼 우뚝하고 그 정신은 일월처럼 천추에 빛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