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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권용일 선생은 1884년 갑신년 5월 11일 한수면 덕곡리에서 나셨다. 천품이 정중하고 위풍이 당당하며 용력이 과인하고, 지략이 출중했다. 일찍이 학문에 성취하고 대의에 입지했다. 때는 조선조 말엽, 국가는 안으로 역신이지 만조하고 밖으로 왜적이 침입하여 국권강탈은 음모로 올미 명성왕후 시해와 을사조약, 정미칠조약을 위조하여 만행을 자행하니 국운이 위급했다. 이 때 선생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여 창의를 도모할새, 운강 이강년 선생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김상태, 이만원, 백남규, 하한서와 그 밖에 장제종사 수백인과 복수설치와 국운회복을 위하여 서사항전했다. 문경갈평전, 신림싸리치전, 단양죽령전을 비롯하여 수다한 공을 세웠다. 운강집 동지고별문에, 본면 대전 삼십여차에 적의 추장 오십여를 죽였다 하였으니, 이 한 말로, 의병의 전공을 알 수 있다. 이 때마다 선생은 좌우 선봉장 또는 도선봉장으로 사력을 다하여 싸웠다. 그러나 무신년 6월 4일 금성면 포전리전에서 이강년 선생이 적탄에 과상을 입고 체포되어서, 서울로 압송되어 동년 9월 19일 교수형을 당했으니 참으로 비통하다. 그 후 선생은 만주로 들어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 후 귀국했다.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고 신해년 7월 16일 별세하셨다. 선생의 일월같은 명충, 추상같은 위엄, 그 공적을 어찌 조각들에 새기랴. 여기 우리 국민이 다시 한 번 깨닫고 지금이나마 곧은 사필로 그 당시 역적 친일파를 응징할 것이며, 국가 없는 국민에게 학대와 천시가 어떠했나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자못 역사의 전통을 세워, 민족정기를 확립해야 한다. 선생의 대의는 이 고장 불멸의 자랑으로 후세까지 숭모하고 본받게 하고 자랑비를 세워 기리 전하고자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