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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제천군청 잠업계에 근무하였으며 고종 황제 국상때 제천 대표로 서울에 파견되자 최인으로부터 항일투쟁할 것을 교육받고 독립선언서를 손에 쥐고 귀로에 강원도 횡성 한영교와 원주 이연호에게 거사를 부탁하였다. 3월 10일 제천에 도착하자마자 동지 권종필 이기하 김필현 등과 모의하여 3월 17일 정오로 시위 일시를 정하고 장두성은 단양에서 차은성은 영월에서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조명구 등 20여명으로 하여금 제천읍 하소리 용바위 밑에서 하루종일 은신하여 태극기 천여매를 만들고 17일 모여드는 장꾼에게 나누어 주고 정오를 기하여 일체만세를 부르도록 만반준비를 하였다. 17일 정오 공은 권종필 이기하 김필현 등과 같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하니 이날 운집한 장꾼 학생 합열하여 뒤를 따르고 읍내로 전진하여 경찰서에 당도하니 왜병들은 발포하여 저지하고 해산시켰다. 이때 봉양 사람 2명 영월 사람 1명 단양 사람 1명이 총에 맞았다. 흥분한 군중은 굴하지 않고 읍내 전원을 돌아다니며 만세 고창하며 시위하였다. 공은 목이 쉬고 피가 온 몸에 낭자하였으나 용기가 배가되였고 연초 소매상 일본인 동근도 감탄하여 결사투쟁하는 모습을 보고 담배 1갑을 대접하였다. 이날 자정까지 시위를 벌리며 우국론을 벌리다가 매국노 형사 사동근에게 체포되여 감금되였고 3년간 복역하였다. 해방 광복후 공은 의림지에 영호정을 중수하여서 친교들과 시주로 낙을 삼았으며 존?돈족사업에 여력을 기우렸다. 6.25 사변후 역시 황폐된 영호정을 수축하였다. 초배 평산 신씨 계배 창녕 조씨이고 장남 상기는 6.25 사변에 사망하고 사손 동희와 손 남희가 있다. 정부 당국의 각별한 배려와 제천향교 김규린전교 및 경주 이씨 제천 모산사과공파 문중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공의 항일투쟁사를 엮어 사적비를 건립하다. 병인 1986년 1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