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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연루되여 만주 흥경현 경찰서에서 비통히 학살되니 그 참상은 목불인견이라. 여사는 시모와 아들의 생명보존을 위하여 풍찬노숙 만주 땅을 헤매며 남편을 내조하다 1934년 차자 연익을 출산하였으나 천인공노할 왜경이 여사가 은거한 집에 불을 질러 구사일생으로 시모와 아들을 구출하시니 이 어찌 선대의 은우하심이 아니리요. 그것도 잠시 이듬해 7월 남편 류돈상 지사가 대한독립단 청년단원 교육 중 왜적의 급격으로 피체되여 무순현옥에서 모진 고문으로 빈사 상태에서 출옥 즉후 순국하니 아들을 잃은 충격에 노시모마저 운명하시다. 이때 여사의 나이 28세라. 황막한 이국 땅에서 두 아들에 목숨을 지키고져 몸부림친 형극의 고초를 어이 다 상상하리오까. 여필종부라 시재당숙 극와장의 인도로 두 아들을 이끌고 충북 산청면 고국을 찾았으나 호구지책을 감내할 길 없는 가난에 다시 만주로 가게 되니 독립투사의 아내와 자식이 머물 곳은 한반도 땅이나 만주 땅이나 막막할 뿐 잃어버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항쟁의 시련은 노모와 젊은 아내 어린 아들까지 지탱할 길 없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손가. 사면초가 왜적의 소굴에서 천행만고 목숨을 부지하다 폭악한 왜경에게 잡혀 잔인한 고문의 여독으로 1940년 3월 초 어느날 천추의 한을 가슴에 묻은 채 가련히 생을 마치시니 향년은 33세라 한다. 시대비운의 역사속에서 여사께서 격으신 생의 수난은 독립운동가의 딸과 3대를 이어 구국투쟁에 목숨 바친 독립지사의 며느리와 아내로서 걸어오신 발자국마다 혈루로 얼룩졌으니 오호통재라. 이 쓰라린 사록은 천지신명이나 아실런지 어이 필설로다 형용하오리까. 그 후 장자 연직마저 요절하니 유일한 혈손은 연익이라. 광복 후 12세에 환국하여 정처없는 유랑생활로 성장하여 1968년 선영을 찾아 통곡으로 성묘하고 1978년부터 춘천에 정착 순국선열의 충의선양과 묘성역화사업에 진력하다 평생을 오매불망하던 선대의 유해를 찾아 만주로 들어가 994년 천우신조하여 조모 윤희순 여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 선영에 안장하고 다음해부터 수차 만주로 가 부모님 유해를 찾았으나 뜻을 못 이루어 아버님이 순국한 무순 땅 흙 한 줌 떠다 혼백을 모시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