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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경술국치를 당하여 외당이 가권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들어가 의암 선생과 함께 국권회복을 도모하다가 외당과 의암이 차제로 하세하여 대의를 펼 수 없게 되자 공은 이로 인하여 병을 얻어 을묘년 10월 2일에 돌아가니 요동 회인현 대아하에 안장하였다가 경오년에 장자 돈상이 고향인 관천리 선영하에 이장하였다. 공의 배는 해주윤씨 휘 희순이니 해양군 양간공 희평의 후학 생익상의 여이다. 철종 11년 경신에 출생하니 천성이 씩씩하고 활발하여 16세에 공에게 시집온 후 집안의 대소사를 무난히 처리하였다. 조선말에 외당이 의병을 일으킬 때에 윤씨는 부녀들을 뫃아 군자금을 거두고 의병활동을 후원하였으며 의병군가 안사람 의병가 등을 지어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경술국치 후 요동으로 들어가 외당의 국권회복운동을 돕다가 외당과 항재가 연하여 돌아가고 또한 독립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장남 돈상이 왜병에게 피살되자 3대에 걸친 의병활동에 참여하던 윤씨는 원한에 사무쳐 을해년 8월 1일에 돌아가니 요동 해성현 묘관 둔지산에 안장하였는바 세월과 인사를 헤아리건대 고국으로 반장할 가망이 없으므로 장손 연익이 갑자년 6월에 윤씨의 신위를 옥석에 새기어 공의 좌측에 합폄하였다. 임술년 11월 9일에 강원대학교 이상주 총장이 발산리 항곡에 해주윤씨 의적비를 세워 그 공적을 찬양하였으며 또한 국가에서는 윤씨의 구국활동에 대하여 계해년 8월 31일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한 바 있다. 공의 선계와 자손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