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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종제 의암 선생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가 형세가 여의치 못하니 여선 곡산 영변 초산 등지로 전전하여 요동으로 들어갔다가 정유년에 환국하였다. 정미년에 왜적이 고종황제를 핍박하여 장제로 전위케하며 정부의 군대를 해산케하자 각지에서 격렬한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에 선생은 족숙 항와 선생 등과 모의하고 의병 6백여 명을 모집하여 춘천진 병산과 가평 주길리 등지에서 싸웠으나 왜병의 우세한 무기를 감당할수는 없었다. 선생은 제천 장담으로 가서 재거를 도모했으나 각처 의병이 모두 해산되어 뜻을 이룰수 없었다. 드디어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선생은 원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하여 가권을 거느리고 만주로 들어가 의암 선생과 함께 의병 재거를 추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축년 12월 21일에 요동 회인현 대아하춘 유도산만 거제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73세였다. 명년 3월 10일에 서강왕팔가 후산 하록 임좌원에 안장하였다가 경오년에 장손 돈상이 고향인 관천 선영 하향 서원에 이장하였다. 선생의 필생국권 수호운동에 대하여 국가에서는 경신년 8월 14일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배는 파평윤씨니 학생 영만의 녀이다. 헌종 3년 정유에 출생하여 철종 6년 을묘에 선생에게 시집오고 고종 25년 무자 11월 9일에 돌아가니 가평 검단리 임좌에 안장하였다가 갑자년 6월에 이장하여 선생과 합폄하였다. 2남 2녀가 있으니 장남은 제원이요 차남은 제설이며 2녀는 순흥 안승욱과 달성 서정환이다. 제원은 돈상 민상 교상 3남을 두었고 제설은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