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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이근원(李根元)·류인석(柳麟錫) 등 50여 명과 함께 척양(斥洋)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1895년 민비학살사건이 일어나자 통곡문을 지어 발표했다. 그해 11월 단발령이 내려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896년 1월 춘천에서 유중락(柳重洛)·이소응(李昭應)·유중교 등과 함께 1,00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정부에서 파견한 춘천부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曺寅承)이 가평에 도착하자 가평관아를 급습해 조인승을 처형하고 춘천창의포고문(春川倡義布告文)을 선포했다. 군자금으로 300냥씩 갹출하고 여러 곳의 의병과 연락해 같은 해 2월 안보전투(安保戰鬪)를 벌였으나 이춘영(李春永)이 전사함으로써 의병진은 각기 흩어졌다. 1907년 7월 춘성군 남면 여의내골에서 의병 600여 명을 훈련시켰는데 군자금과 탄약이 부족하자 소를 팔아 군자금으로 제공하고 의연금을 모아 탄약을 제조하게 했다. 출처 :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