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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달은 원래 춘천부의 포군이었는데 천성이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여 지방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부(父)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 고조부(高祖父)의 생일에까지 반드시 새로 난 음식을 바쳐서 '김효자'로 불렸다. 일본의 정치 경제적 침탈행위에 분개해 오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고 일제의 내정간섭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에 참여할 뜻을 가졌다. 이때 유중락(柳重洛) 이만응(李晩應) 등을 중심으로 한 선비와 백성들 천여 명이 춘천부에 모여서 습재 이소응(李昭應)을 대장으로 추대한 춘천의진이 형성되었다. 이소응은 대장으로 추대되면서 "…관망하여 곧 호응하지 않는 자나 적의 편에 붙어서 군정(軍情)을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모두 이적 금수(夷狄禽獸)의 앞잡이요, 난신 적자(亂臣賊子)의 도당이니, 단연 군법을 시행하여 먼저 베고 후에 보고할 것이다." 라는 강경한 격문을 8도에 보내었다. 김경달은 이에 즉각 응하여 유중락 의진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춘천의진은 대개 선비들로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전술 전략에 익숙하지 못하였고, 신우균(申羽均) 김귀현(金龜鉉) 등의 지휘하는 관군의 공세가 급하고, 성중에서도 관군과 내통하는 자가 생기게 되니 차츰 군심이 흩어져서 형세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여기서 이소응은 병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몸소 지평(砥平)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아가 협상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2월 17일(음 1월 5일)에 제천의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의진으로 들어갔다. 이때 김경달은 최삼여(崔三汝)의 지평 의진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행군하여서 양근(楊根) 땅 미원(迷源)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전세가 매우 불리한데다가 강력한 경군을 만나게 되자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이때 맹영재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은 의병장 최삼여를 죽여 의병진의 활약을 봉쇄하고 경군의 활동을 도왔다. 그러한 상황하에서도 김경달은 발길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서서 총을 쏘다가 경군에게 생포되었다. 경군은 그의 용감성에 감탄하여 "네가 만일 우리편이 된다면 죽이지 않겠다." 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큰 소리로 "원래 나라의 원수를 갚고, 형체를 보전하기 위하여 나섰던 것인데 불행하여 잡혔으니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어찌 뜻을 고칠 수 있느냐." 하며 그대로 총살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