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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본관은 고흥이요, 자는 치명으로 시조 휘 영의 27세손이라. 1871년 11월 18일 춘천군 남산 외면 가정리에서 부친 중삼공과 모친 여산송씨의 장자로 태어나니 품성이 강직온순하여 총애와 촉망속에 족숙 항와 류중악 선생에게 수학하니 삼강오륜과 위정척사 사상을 몸소 익힌 충효 예의의 덕목을 지닌 청년이 약관에 이르렀을때 잔학무도한 왜적이 국모를 시해하고 단발령 공포로 주권을 흔드는 만행이 일어나니 선생은 류홍석과 함께 이소응 춘천 의병진에 참가 가평 일대에서 투쟁활동을 시작하니 이것이 곧 을미사변이라. 그후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한국군대 해산 등 정미 7조약 체결로 국운이 암울할 때 선생은 족숙 류중악을 따라 류홍석 류제곤 박선명 박화지 등 의기충만한 청년을 규합 6백여 명의 의진으로 류홍석 의병장 주도하에 춘천 진병산과 가평 주길리 일대에서 춘천으로 입성하려는 왜적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으나 모든 면이 적에 비해 중과부족이라. 오직 국권과 민족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한 목숨 초개 같이 바치니 1907년 음 8월 19일 천인공노할 왜군의 흉탄으로 순국하시니 오호통재라. 선생의 향년이 32세라. 애달픈 마음 깊어 추모의 뜻 한량없나이다. 배위 원주원씨도 남편을 도와 윤희순 의사와 함께 군자금을 모아 의병 뒷바침에 헌신하니 부창부수라. 부친 중삼공은 화병으로 이듬해 운명하니 그 상황을 어찌 다 필설로 형언하리요.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2005년 8월 15일 건국포장이 추서되니 선생의 애국충정과 애국애족의 구국정신은 천추만세에 이르도록 민족의 정신적 귀감이 되오리니 영령이시어. 국운 융성과 민족 번영의 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고흥류씨 휘 영연공파 종중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