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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농서공 19세손으로 1860년 서면 방동리에서 나시어 한학을 수학하시며 농업에 종사하시다 천도교에 입교하여 교리를 닦으시던 중 1910년 나라가 파망하니 항일구국운동에 몸바치어 향리 독립투쟁의 선봉이 되셨다. 천도교 춘천교구장으로 신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킬 뿐만 아니라 전답 2만 여 평을 팔아 독립운동자금으로 천도교중앙총부에 헌납하셨고 서울 우이동 봉황각에서 150일간 독립운동운동 수련회에 참여하시는 등 공이 다대하여 교령으로부터 김상천 훈장을 받으셨다. 손병희 선생의 뜻을 따라 윤도선 허현 등과 기미독립선언 감행을 꾀하여 천도교인 수십명을 이끌고 3월 28일 춘천장터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행진하니 천여군중이 환호 합세하여 뜨거운 함성은 그칠 줄 몰랐다. 공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만일년의 옥고를 치루셨는데 법정에서 '빼앗긴 내 나라를 내가 찾겠다는데 무슨 죄가 되느냐'고 일갈하시어 왜인판관의 간담을 서늘케하였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회갑을 맞으심에 찾아간 자손에게 '독립의 서광이 비쳐오는데 여기 있는 것이 오히려 기쁘다'고 흔연해 하셨으니 지사의 풍모에 새삼 숙연해진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시고 1945년 2월에 영면하시니 참으로 애통불금이라 공을 추모하는 정은 날로 더하여 1975년 3월 1일에 강원도지사로부터 독립유공서훈이 있었으며 서면 유지와 방동리민 전원이 공의 뜻을 기리고자 성금을 모아 방동리 입구에 독립투사 추모탑을 건립하였으니 높으신 애국충절은 청사에 길이 빛나리라. 1987(정묘)년 3월 28일 외손 안경렬 근찬 증손 철순 근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