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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응은 의병장 습재 이소응(李昭應)의 종형으로서 춘천 출신이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 사건이 발발하자, 강원도 지역에서는 춘천과 강릉 등지에서 거의의 움직임이 있었으며, 그중 춘천에서는 1896년 1월초부터 의거의 기운이 농후해지면서, 감역 홍시영(洪時永)과 이면수(李勉洙) 등이 방문을 붙이고 통문을 돌려 인심을 격동시키고, 이수춘(李守春)·민영문(閔泳文) 등이 고을 사람들을 격려 고무하였다. 그리하여 1월 20일 유중락(柳重洛)·이만응(李晩應) 등이 중심이 되어 일대의 유림과 백성 천여 명이 춘천부에 모여 습재 이소응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이진응은 아우 경응과 함께 입진한 것으로 보인다. 습재의 춘천 의진은 각지로 격문을 보내어 '왜노(倭奴)'들에 대하여 '선참후보(先斬後報)'할 것을 강력히 촉구함으로써 적극적인 척왜(斥倭)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때 정부에서 조인승(曺寅承)을 춘천부 관찰사 겸 선유사로 파견하였으나 춘천의진은 그를 왜노로 간주 처형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조정에서는 1개 중대의 병력을 춘천으로 파견하였다. 이로써 춘천 의진에 대한 관군의 공세가 급격해지자 훈련이 부족하고 전술·전략에 익숙치 못한 의진은 쉽사리 붕괴되었다. 습재는 병력 증강을 위해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아 협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월 17일 제천의 의암 류인석(柳麟錫)의 의진으로 들어가 합세하게 되었다. 이에 이진응은 춘천 의진을 인계 받아 주장이 되었다. 이때 관군과 일본군의 집중공격을 받으면서 의진을 사수하다가 끝내 실패하고 순절하였다. 이진응의 사후에는 그의 아우 경응이 춘천의진의 주장으로 추대되어 이를 계속 지휘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