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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農抗日運 動紀念塔 銘 (춘농항일운동기념탑명) 봉의산과 소양강이 아우러진 언덕에 젊은 知性을 드높인 春川農業學校가 있다. 구한말에 개교한 춘천농업학교는 관동지방에서 유일한 中等학교로서 이地方 개척을 선봉에서 이끌었고 일제치하에서는 학생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여 韓國近代史에 금자탑 을 세웠다.三․一운동에 이르러 春農 항일운동의 포문을 열 때 교내의 만세시위로 그 첬지만 그것은 해방의 날까지 朝鮮本位敎育을 위 한 투쟁의 기초가 되었다. 一九三六년 六․十만세 운동때는 送義在등이,一九二九년 광주학생운동때는 尹衡重등이一九三二년 동맹휴학때는 李文求등이앞장서 활약했고,一九三八年 淸平寺 소풍때는 전교생이 농성 하여 일본인 교원을 축출한 개가를 올렸다. 그에 앞선 一九三七년에는 讀書會운동을 일르켰다,처음에 李俊桓이 회장을 맡았다가 나중에는 金載河가 맡아 사상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一九四十년말에 발각 되자 襄陽 平康 金化 三陟 金浦 聞慶 茂山등 전국 각처에서 졸업생까지 잡혀와 폐교설이 나돈 위기를 맞기도 했다.一九四二년 十월 모두 불구의 몸이되서 출옥했으나 회원들은 사상감시에 묶여 식민지인의 굴래를 벗을수 없었다. 그렇다고 젊은 기상이 꺽기겠는가, 一九四三년부터 학생조차 전쟁터로 끌려갈 때 李安聖등은 日本國王을 비롯한 그들 수뇌부에 항의서를 송달하며 투쟁했다. 그러다가 잡혀 八․一五 해방을 맞아서야 自由의 몸이 되었다 학교에도 正義를 찬미하는 노래가 비로서 울려 퍼젓다.그래서 春農학생운동은 靑史에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값진 전통을 디디고 선진농촌의 햇불을 들때이다. 그것이 선배들의 遺志를 꽃피 우는 길이고 그래야 당초의 建學精神에 부응한 열매를 맺을 것이 아니냐 一九九五년 八월 一五일 塔銘 문학박사 趙東杰 짖고 塔銘 如 初 金膺顯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