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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각처에서 유격전을 계속하였으니 전도군 서상열은 화천에서 잃어버리고 초산에 으르러선 이범직등이 전사하므로 님은 군사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가 구국운동은 교육을 병행해야한다 하고 동포자제들을 지도하다가 다시 돌아와 평안도 황해도의 여러 지방을 순유하며 6,7년동안 민족항쟁의 씨를 뿌렸다. 64세때에 을사매국조약이 체결되자 이강년과 이인영등이 의병을 일으키므로 선생은 각도 창의소에 격문을 보내고서 또사디 뜻을 품고 해삼위로 나간 동안 왜적들이 선생의 고향집을 불태웠으며 17세의 아들 해동이 변장 탈출했었다. 선생은 관일약을 지어 동포를 격려하고 안중근의 의거로 인해 잠시 피신했다가 이등ㅁ해 서기 1910년 5월 15일에 13도창의군도총재로 추대되니 69게요 8월 19일 마침내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이상설들과 성명회를 조직했었다. 이때에 가족들은 모두 요동으로 옮기어 거기서 3년동안 유랑생활을 맛보다가 다시 흥경현 원천자로 관전현 방취구로 전전해 다니면서 해외동포들을 볼보더니 을묘년 서기 1915년 1월 29일 74세로써 피눈물 괸 생애를 마치자 흥경현 평정산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가 21년이 지나서 고향에 옮겨 모셨다. 오늘 여기 선생의 모습을 새겨 세우고 정의의 일생 사적을 천주에 전하는 뜻은 다만 그 구국정신을 이어 받자 함이니 우리 이 앞에서 손 들고 먕서를 짓자. 글지은이 이은상, 글쓴이 김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