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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민계몽에 앞장서다 독립협회의 정치체제 개혁운동으로 체포되셨다. 석방후 일제가 갑오동학운동 이래 한국을 침략할 목적으로 맺은 노일협정의 부당성을 황성신문 사설에 논박하여 다시 경무청에 구속후 석방되었으나 끝내 사장에서 물러나니 노심초사 구국운동에 심혈을 기울이신 선생의 하해같은 심흉이 얼마나 답답하셨으리오. 1905년 3월 성주목사에 부임 선정하시고 있을때 을사조약의 늑결을 통분하여 사직한 선생은 다음해 양양군수로 부임해 그곳에 현산학교를 세워 구국사상교육에 힘썼으나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한국군대해산으로 사임하셨다. 그후 선생은 대한협회를 창립 회장이 되어 동협회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며 1908년 4월 강원도 지방의 애국계몽단체인 관동학회를 조직 회장으로 교육월보를 발행하시는등 민족사상계몽에 힘쓰셨다. 1910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는 국치민욕의 참담한 지경에 이르매 선생은 민족자주독립의 목표를 새세대 교육에 두고 배화학당 교사와 상동청년학원장을 겸하며 자주독립을 위한 민족사상교육에 혼신의 힘을 쏟으시다가 건강악화로 선영이 있는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낙향한다. 다음해 1919년 9월 모곡학교를 설립하여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모본을 전국에 배포하며 애국심을 고취하셨다. 1933년 11월 기독교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인 십자가당 조직과 무궁화사건의 발각으로 일경에 체포되니 선생을 비롯한 모곡학교의 교사와 직원 교회목사 언론인 춘천군 남면 남산면의 송완식 어인선 등 17명이 피체되자 잔인무도한 왜구의 모진 고문에도 선생은 제자와 동지들의 연루를 배제하여 그중 12명이 홍천경찰서에서 경성지방법원으로 압송되어 6명이 기소 투옥되었다. 혹독한 고초끝 이듬해 출옥한 선생은 학교를 통한 애국사상교육과 교회를 근거로 한 민족정신계몽과 국권회복을 위한 자주민권 자강운동에 생애를 바치시다가 1929년 4월 5일 모곡리에서 서거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높은 뜻과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춘천시 남면 남산면 출신 제자의 후손들이 선생과 선생의 애국충정과 숭고한 유지를 기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 감화되어 강원대학교의 지원으로 이곳에 추모비를 건립하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