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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전투하였다. 그 뒤 임형순 의병장은 본거지를 이천과 광주의 접경인 원적산에 두고 양평 용문산과 광주의 대화산과 연계 교차하면서 이천 광주 양평 지평 여주 등지로 유격전으로 수시로 습격하여 일군에게 맏대한 피해를 주는 동시에 치열한 격전도 여러번 하였다. 특히 일군이 서울에서 이천 충주로 가는 연도와 수원에서 이천 여주로 왕래하는 일군을 산속에서 매복하였다가 기습을 하하여 수십차의 전과를 갖기도 하였다. 또한 일보병 51연대에서 충주로 군량을 수운할때 이를 탐지한 공의 부대와 양근의병 천 여명이 이포 근처에 도달할 무렵 불시기습하여 두 시간 교전 끝에 군량을 노획하였는데 수 명의 병력을 잃고 여주로 도주한 일군은 다음날 여주수비대와 합세하여 이포에 왔으나 의병들이 없는고로 민가 수십 호만을 불태웠다. 공은 양지 추계리에 매국노 송병준의 집을 밤중에 습격하여 일군 순사를 사살하고 무장을 노획한 후로는 일군 40여 명이 주둔하였다. 그해 11월 4일, 이포 방면으로 정탐 나가던 일본군과 한인 순사 5명을 산중에 매복하였다가 불시에 포위공격으로 전멸시키었다. 이포와 이천 사이는 일군이 나루를 이용하여 서울에 왕래하는 주요 통로였는데 수시로 의병의 습격을 받으니 당시 일군의 고심이 심하였다. 이천 북방 원적 산하에서 일군과 대격전이 몇 차례 있었는데 의병은 산고지에서 공격하고 일군은 산하에서 응전하게 되니 일군이 불리하여 큰 피해를 받게 된 일군은 그 보복으로 이천읍을 위시하여 백사면 신둔면 부발면 일대의 각 동리를 충화한 것이 900여호에 이재민이 5000여 명에 달하도록 초토전의 만행을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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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행위하는 일진회의 응징에 있어서 매일 밤 회원을 사살하는 것이 각 군에서 파생적으로 자행되었고 1908년 2월에는 이천 일진회원을 19명이나 사살하는 대토벌전이 있었다. 그리하여 일진회원들은 추계 매국노 송병준 집으로 집결 피신했는데 그 수가 400여 명에 달하였다한다. 공의 부하는 일군의 야간기습에 큰 타격을 받은데 이어 원적산 토벌작전으로 패전을 거듭하여 제천 방면으로 갔다가 1908년 5월 안동 전투에서 전멸하니 시신조차 거둬주는 이 없이 30의 의기청년 유생은 천추의 한을 남기고 일생을 마치니 애석하도다! 산마루에 두견새만 홀로 슬피울어 고혼을 위로하였도다. 일제는 공의 가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추출하여 공의 고와 제 그리고 어린아들 기빈은 유리하다가 객사하였고 유족이란 다만 어린 딸 영단만이 살아남아 박공 정호에게 부양되어 자부를 삼으니 그가 바로 박운한의 자당이다. 이렇듯 숭고한 공의 애국충절의 의거가 역사에 매몰된 채 빛을 보지 못한지 80여 성상만에 이천군 향토사연구회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자 만시지탄이 있으나 향토의 제현들이 뜻을 모아 공을 추모하는 비를 건립하여 자손만대에 귀감을 삼고자 명하는 바이다. 오호통재라!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창의해서 좌충우돌하였으나 큰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젊은 기개가 넘칠 나이에 원통하게도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니 이에 배달민족의 비통은 하늘에 사무칠 뿐이로다. 공이 살신성인에 뿌리신 숭고한 피로 이 강토에는 광복이 왔고 되찾은 금수강산은 번영을 구가하는 지금에 당신의 명복을 비노니 기뻐하소서! 1993년 11월 의병장 임형순 순국열사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 건립 교육학박사 정암 김동옥 지음 담양후인 전광홍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