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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운동가 구연영 순국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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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운동가 구연영 순국기념비 구연영은 1864년 8월 20일 구철조씨의 3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순경. 본관은 능성이며 18세 때 변미레와 결혼하여 슬하에 정서, 성서, 완서, 종서 네아들을 두었다. 구연영은 누구의 전도도 받지 않고 1897년 2월 자진하여 상동교회 스크랜턴 선교사를 찾아가 기독교인이 되었고, 3년 후 덕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구연영은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이끄는 엡윗청년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 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민중계몽, 강연, 선교, 구국 활동과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구연영은 이천중앙감리교회, 3대 담임전도사로 부임하여 경기도 광주 이천 여주, 앙평지방을 돌며 전도하였고 노곡 궁평, 이포, 양평 등지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일본의 조선침략이 노골화되자, 구연영은 김하락, 김태원, 조성학, 신용희와 함께 이천으로 내려와 1,000여 명의 의병으로 이천수창의소를 조직하여 전국 최초로 의병항쟁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천수창의소의 중군장이 된 구연영은 1896년 1월 넓고개에서 일본군수비대와 첫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 후 이현전투와 남한산성전투를 비롯한 의병 투쟁을 앞장서서 지휘하였다. 구연영은 1905년 정식 전도사 칭호를 받고 이천읍 교회를 비롯한 9교회 교인을 이끌게 되었는데 그는 칼 대신 성경을 들고 십자가의 구원을 외치며 이천, 광주, 장호원, 여주지방을 순회하였고, 자신의 집 앞에다 장대 끝에 십자가를 매달아 세워놓고 예배를 드리면서 의병활동과 선교활동, 애국계몽활동을 병행하였으며 밤에는 구국회원들과 기도회를 열고 항일계획을 논의하였다. 구연영의 설교 주제는 늘 항일과 일진회의 정체 폭로였으며 일본의 죄상 폭로였다. 이러한 규탄 강연으로 일본 측으로부터 주목을 받아 오던 중 일진회의 밀고로 아들 정서와 함께 체포되었다. 구연영 부자는 이천 관아(전 이천경찰서 자리)로 끌려가 가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과 애국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고, 일본경찰로부터 애국동지 명단 공개를 강요당했으나 끝내 함구하고 굴하지 않았다. 일본경찰들은 비분하는 부자의 팔다리를 칼로 찌르고 갖은 고문을 자행했으며 결국 이천 장터 왜나무 아래 묶인 채 부자가 함께 당시의 관아 서편 작은 언덕(창전동 365번지)에서 총살당하였다. 이날이 1907년 8월 24일(음력 7월 16일)로 그 때 구연영의 나이 44세였으며 아들 정서의 나이는 25세였다.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아들 정서에게는 1991년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구연은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한 감리교의 자랑스런 순교자이며 이천의 의기를 드높인 순국지사였다. 구연영. 그 이름은 순국의 높은 뜻과 함께 이 땅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 고귀한 순국의 정신을 기리는 뜻에서 피 흘렸던 자리에 기념비를 세운다. 2007년 8월 24일 구연영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행사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