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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택수 순국열사는 유창륙의 이남일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열사의 아버지 창육은 한국 전형적인 선비로 이천읍에서 한문서당 훈장으로서 청빈한 유생이었다. 유열사는 어려서부터 부모께 효성이 지극했으며 엄격한 유교적 가정교육을 받았다. 성격은 외유내강하여 불의에 참지 못했으며 일함에는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행동은 어찌나 민첩한지 같이 날래다는 칭찬을 받았다한다. 그의 친동생인 유남수와 이수흥 열사와 친한 친구인 관계로 열사가 만주에 있는 대한임시정부 참의부에 있을때서 왕래가 있었다. 나라잃은 민족의 설움에 격분한 유열사는 참의부의 이수흥 열사가 1926년 6월에 이천에 오자 천재일우에 좋은 기회로 알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이열사에게 맹세했다. 그때부터 이수흥 열사와 함께 군자금 조달사업으로 서울 경기 일대를 횡행하여 거사함에 신출귀몰하게 연쇄적으로 이르켰다. 이는 일제에 대한 무서운 신경전이기도 했다. 이에 일제는 당황하여 중부 일대에 비상경계령을 펴고 수많은 병력을 동원했으나 단서는 커녕 속수무책이었다. 대한임시정부에서는 이를 가르켜 국내 4개월 전쟁이라고 했다. 불행히도 밀고로 인하여 이수흥 열사에 이어 유열사도 체포되었다. 3년여 예심에서 갖은 악형과 고문을 당하면서 조금도 굴함이 없이 법정에서도 독립운동의 당연성을 당당히 역설하며 태연한 자세로 일제 침략을 비책했다. 결국 1929년 2월 27일에 이수흥 열사와 함께 애석하게도 29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을 당하였다. 이 비보에 온 겨레는 슬퍼했고 억울함을 통탄했다. 열사의 희생은 헛되지 않아 이 일이 있은지 16년만에 조국에 광복이 왔다. 우리 정부에서는 독립유공자로 국민장을 추서하고 유해조차 없으므로 국립묘지의 무후선열제단에 그의 위패를 모시었다. 유열사는 갔지만 그의 애국충정은 우리 겨레의 가슴에 길이 남아있고 그의 넋은 이 강토를 지키리라. 이에 향토의 인사들이 숙연히 옷깃을 여미고 정중히 추모하며 유열사의 애국애족의 거룩한 혼을 영원히 기리고 계승하고자 정성을 모아 추모비를 세움에 있어 위원회에서 비문을 위촉하기로 모든 문헌을 상고해서 삼가 이 글을 표석에 새기노라. 1984년 11월 일 교육학박사 정암 김동옥 글을 짓고 일도 김태수 글씨를 씀 유택수열사추모비건립위원회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