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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이수흥 추모의 글 여기 스물두살의 꽃다운 나이로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다 희생한 이수흥 열사의 혼이 있다. 살아서 일제의 치욕된 삶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영혼이나마 깨끗한 대한의 아들이고자 염원하였기 때문이다. 열사는 1905년 항일독립투사인 이일형의 늙마에 얻은 외아들로 이천읍 창전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구국운동에 자극받아 배일사상에 눈 떴고 열아홉살에 독립운동에 몸바치기 위해 만족로 건너갔다. 그는 대한임시정부 만주참의부에 가담하여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한때는 일본군의 기습으로 부대가 전멸되었을때 세 사람의 살아남은 하나로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채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1926년 스물 두 살 때에 일제의 대관들을 처치할 목적으로 국내에 숨어 들어 평안도와 황해도를 지나는 중에도 큰 사건을 이르켰고, 7월부터는 서울 경기 일대를 횡행하며 군자금조달을 위하여 대담무쌍하게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니 일제는 당황하여 비상 경계령을 펴고 일본경찰은 전병력을 총동원했으나 그 흔적도 못찾아 신출귀몰이라고 했다. 대한임시정부에서는 이를 국내 사개월 전쟁이라고 했다. 슬프도다. 밀고로 인하여 애석하게도 체포되어 예심에서 삼년여 세월간의 악형을 당하며 그 취조문만도 2만여 장에 달했으나 그는 오히려 남의 땅을 짓밟는 일제의 죄를 비책하고 내 나라 찾는 독립항쟁의 의로움을 외쳤다. 일본말을 쓰기 싫어 끝까지 통역을 대고야 말을 했으니 열사가 저들의 위협에 태연자약했던 뜻은 뒷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1929년 2월 17일에 스물 다섯의 젊은 나이로 유택수 열사와 함께 사형을 당하니 이 비보를 들은 겨레는 통분하여 옷깃을 적시였다. 열사의 희생을 헛되지 않아 조국에 광복이 왔다.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국민장을 추서하고 그 유해는 국립묘역 선열묘지에 모시었다 향토의 인사들이 열사의 고결한 애국충정의 얼을 영원히 기리고 계승하고자 이수흥열사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열사의 동상을 세움에 있어 위원장인 김동옥 박사가 비문을 청탁하기로 열사의 전기와 모든 문헌을 상고하여 삼가 이 글로 그 크신 뜻을 후대에 전하노라. 문학박사 김태준 글을 짓고 일도 김태수 글씨를 쓰고 강대철 기념상 조각 1984년 12월 일 이수흥열사기념사업회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