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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904년)에 육군법원 주사 판임관 6등이 되었다. 국정 난세로 동년 사직하고 향리에 유하였다. 을미년 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므로 조국독립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투쟁할 것을 결심하고 향리를 떠나 상경하여 서기 1919년 상해임시정부 연락요원이 되어 충북 제천시 덕산면 성내리 양동면 쌍학리에 대대로 내려오던 임야 전답을 처분하여 거금을 독립운동자금에 보태고 동지 윤교병과 같이 충청도 경상도에서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하다 서기 1921년 4월 체포되어 4년의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동지 윤교병 사돈 이정우의 향리인 논산군 가야곡면 양촌리에 간이학교를 설립하고 구국계몽운동과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옥고의 후유증으로 서기 1940년 4월 18일 졸하여 양촌리 전록에 장하였다. 부군과 양천허씨 슬하에 2방하니 장은 승찬(계성) 차는 익찬(명복) 손은 기정 기준 기영이고 증손은 준흠 영흠 창흠 문흠 용흠이며 현손은 찬호 윤호이다. 부군은 이명 상필로 활약하여 본명 상면과 달라 공적을 모르다 서기 2004년에 후손이 알게되어 건국장 애국장을 받았다. 배 양천허씨는 부군이 옥중에 있을 때인 서기 1923년 12월 6일 졸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