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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그 실천을 위하여 학문에 정진하셨다. 그런데 시국은 일본과 친일파들이 우리나라를 강탈하려고 국권을 농락하더니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려 민족 고유의 풍습과 정기를 말살하면서 침략의 의도를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처럼 국가와 민족의 존망이 경각에 달린 참담한 지경에 이르매, 장군은 분개하며 이리와 같은 일본 앞에 짐승처럼 사는 것보다 차라리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람답게 죽겠다면서 의병투쟁에 나섰다. 장군은 아버지 퇴앙 선생의 계획과 주도하에 이공 춘영 김공 백선 등과 함께 을미년의 거족적 항일의병투쟁의 대표적인 지평의병을 일으키셨다. 장군은 군무부 유사 전군장 중군장의 군무를 맡아 장졸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자신의 신병을 돌보지 않고 의리로써 충성을 다하니 모든 의병이 존경하여 따랐다. 장군은 왜적과 누전누첩하며 적을 소탕하고 친일 관청을 점령하여 친일 수령을 목베는 등 응징하며 전과를 올리셨다. 그러나 서기 1896년 병신 4월 13일 제천 남산전투에서 적의 탄환에 다리를 맞고 붙잡혀 적의 야만적인 난장에도 굴복하지 않고 왜적을 향해 크게 호령하다 순절하시니, 향년 32세이시다. 그러므로 모두들 경탄하며 슬퍼하고 울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박공 정수 이공 용규 등이 갈마곡에서 장군의 시신을 찾아 거두어 제천시 화산 서좌에 임시 장사 지냈는데, 서기 1980년 무신 5월에 손자 덕희가 양동면 석곡리 사이 실 자좌에 천묘하였다. 아! 슬프다. 장군은 6의사 열전에 기록되고 소의신편에 화서문하 연원사절 10현에 들었으며, 서기 1962년 임인 3월 1일에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배위 덕수이씨는 문정공 택당 선생의 후손 민영의 따님이시다. 서기 1862년 임무 6월 30일에 출생하여 1948년 8월 무자 12월 24일에 졸하셨다. 생 2남 하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