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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최대현은 대한제국시기 오위장(五衛將) 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1919년 3월 31일 양평군 강하면(江下面) 사무소 앞에서 68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면민 30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음날인 4월 1일 양서면(楊西面) 도곡리(陶谷里)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부근에서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4월 3일 강상(江上).강하.양서.고읍(古邑) 등 4개 면의 주민 4천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후 시위 군중을 인솔하고 고읍면 옹암리(瓮岩里)와 용암리(龍岩里)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가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1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및 벌금 20원을 받고 이에 불복 공소하여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아들 최영식은 4월 3일 만세시위 도중 아까운 나이에 장엄하게 순국하였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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