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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乙未年) 8월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같은 해 11월 공포된 단발령에 항거하여 곡수에서 살고 있던 괴은 이춘영은 당시 지평현 상동면(양동) 퇴앙 안종응과 의병거의를 상의하였고, 지평현 장둔면(청운) 김백선 장군은 지평관아에 의병거의를 청하였으나 지평관아에서는 의병거의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춘영 장군과 김백선 장군은 지평포군 400명을 모집 창의하여 원주 안창으로 이동한 후 을미년 11월 28일 「지평의병」의 깃발을 들었다. 지평 금리(월산리) 금계 이근원 선생(화서 이항로 선생의 후학)은 문파의 전략을 지원하였고 그에게서 학업을 닦은 안승우 장군(안종응의 아들)등 후학과 평민들이 합류하여 의병의 수가 1천여 명에 달했으니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원주관아 점령에 이어 제천, 충주, 단양 등지에서 크게 승리하였고 인근지역 의병봉기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후일 「지평의병」은 17세의 지평 소년의병 손용문(손덕화 의병의 아들)과 금계선생의 후학인 천낙귀 등 평민들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니... 지평! 지평! 국맥 「지평의병」이여!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항쟁했던 선열들의 호국정신을 후세 만대에 기리고자 한다! 2012년 6월 1일 양평군 지평의병정신선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