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page


333page

모를 극진히 모시였다. 명문의 후예이라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으나 불의를 멀리하고 지조를 지키다 교우 안승우와 뜻을 같이하여 구국 준비운동에 착수하여 4227년 갑오경장과 이듬해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자 더 참을 수 없어 4228년 지평 양동 원주에 동지들을 규합하여 동년 11월 28일 원주군 지정면 안창리에서 전국에서 가장 먼저 구국 창의에 기발을 올리고 의병장이 되여 원주를 거처 제천에 이르러 이필희와 함께 선사 유인석을 받들어 대장으로 추대하고 공은 중군장이 되여 충주에 도착하여 일군을 격파하고 성을 점령하였다. 당시 충주관찰사 김규식이 가흥에 있는 일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음으로 의병은 28차의 격전을 하고 4228년 1월 3일에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현감 서상기를 효수하고 1월 5일에 관찰사 김규식을 참수하여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고 패주하는 잔당을 추격하다 종사 홍선표와 의논하든 중 일군의 유탄에 관통되여 장렬하게 일생을 마치시니 공의 나이 29세였다. 공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유대장 이하 모든 장졸들이 애통해하고 원근 상하 승속 남녀 불문하고 할 일을 놓고 슬퍼하니 관일 합동군까지도 비통하였으니 웅대한 기상과 정의는 뒤를 있는 의병사기의 귀감이 되었다. 공의 유해는 장질 종한이 치상하여 선영하에 모시는데 지나는 곳마다 애도의 전송인파가 인산을 이루었다. 묘는 양동면 석곡리 산 97의 1번지에 안장되였으며 4296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았다. 개국 4326 계유 12월 6일 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