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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대장소(大將所)를 설치하고 2월 3일(음 12월 30일) 부서를 확정지었다. 김백선은 선봉장에 임명되었으며, 충주(忠州) 진격을 결정하고 2월 16일(음 1월 4일) 행군을 시작하였다. 대군이 성 아래에 이르렀으나 성문이 굳게 닫혀 들어갈 수 없었다. 밤에 김백선이 동문을 넘어 들어가서 성문지기를 죽이고 성문을 열었으므로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적군은 모두 북문으로 도망쳤다. 다시 적군이 쳐들어올 기미가 있자 김백선은 병사 3백 명을 이끌고 적군을 추격하여 멀리 쫓았으니 충주함락은 김백선의 공이 컸다. 제천을 본진으로 삼고 선봉장 김백선은 가흥(佳興)방면으로 진격하여 3월 16일(음 2월 3일)부터 총공격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충주 매운(梅雲)에 이르러서 적과 대적하기에 군사의 수가 적음을 깨닫고 군사를 머물게 하고 본진에 청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중군장 안승우는 원병을 보낼 형편이 못되었다. 마침 경기도 의병장 심상희(沈相禧)가 원주에서 청풍(淸風)쪽으로 나왔다가 구원하여 준다고 하였으나 지체하고 싸움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며 다만 참장(參將) 한동직(韓東直)만이 원주에서 제천으로 나오다가 원서(院西)에서 가흥으로 진군하는 제천 장병들을 만나 함께 싸움터로 나갔던 것이다. 즉 증원병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작 전투시에 있어서는 한동직이 거느린 군사는 먼저 싸우기를 기피하여 멀리 퇴각하기까지 하였다. 3월 19일(음 2월 6일)에 가흥 근처에서 산을 의지하고 주둔하여 있던 출정장병들은 적이 강을 건너와 청룡촌(靑龍村)에 들어가서 불을 놓는 것을 보고, 내려다보며 공격을 퍼부어 많은 적병들을 죽이고 다시 추격하여 강을 건너 바로 적 진지 부근까지 들어가서 맹렬히 공격하니 적진에서는 크게 당황하였다. 그러나 한동직이 거느린 원주 군사가 미리 퇴각하고 선봉장 김백선의 군사 역시 호응하여 공격하지 않으니 여기서 기운을 얻은 적군은 군사를 양쪽으로 나누어 포위 태세를 취하며 공격하여 왔다. 당시 피아(彼我)의 병력형세는 모두 합세하여 싸워도 승부를 알 수 없을 터인데, 의병진의 일부 병력이 참전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중과부적으로 전세는 의병진에 불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