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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 등 천여명이 거의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선생과 이경응(敬學 李景應), 정인회(鄭寅會) 등의 추대로 의병대장에 등단(1월 20일)한 종형 이소응(習齊, 李昭應)을 중심으로 군사장에 종조부 이면수(盤湖 李勉洙) 전군장에 종형 이면응(李冕應) 순무장에 동생 이경 그리고 아장(亞將)에 선생이 발탁되어 춘천의진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제 수천명으로 늘어난 춘천의병은 당시 삭발하고 부임하는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曺寅承)을 잡아들여 을미의병 가운데 가장 먼저 의세를 떨치는 동시에 그 여세를 몰아 서울진격에 나섰다. 그러나 무기의 열세로 가평 부근 벌업산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하여 춘천의 약사현으로 퇴각한 이소응은 의진을 이진응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포군을 보충하기 위하여 지평으로 떠난후 유인석(毅菴, 柳麟錫)의 제천의진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처지에서 의병대장에 오른 이진응은 패산한 잔여의병을 수습하여 추격해 온 관군과 격전 끝에 전사하여 그 후임으로 선생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부득이 의진을 이경응에게 맡긴 후 와병중인 노모(72세)를 모시고 가족과 함께 세거하던 춘천을 떠나 여주로 이주하였다. 한편 의병활동 과정에서 선생은 춘천관찰부로 진격, 공금을 탈취하여 의병자금으로 충당하는데 1898년 7월 금전포흠죄(金錢逋欠罪)로 모든 전답을 몰수당하여 생활이 궁핍하였다. 이때 선생은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승지 엄주완(嚴柱完)의 숙사(塾師)로 초빙되어 그의 동생 엄주관(嚴柱寬), 독립운동에 투신, 아들 엄항섭(嚴恒燮), 임정국무위원 역임 등 후진교육에 전념하였으며 1906년 재종제 이민응(壽春 李敏應)의 도음으로 대신면 보통리 판서 조석우(曺錫雨)의 구택으로 이사하여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으나 마침내 1938년 6월 23일 가정훈행록(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