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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은 대한민국 국토의 중심지로 산자수명하며 도학과 의리를 수상하는 기품이 있는 의향이요 한국 근대 항일민족운동의 발원지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내정 간섭하더니, 마침내 1895년 을미사변이란 국제적 만행을 저지르고 단발령을 시행하는 등 병탄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국수보복의 기치 아래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으니 이것이 을미의병·전기의병이다. 1904년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의 체결, 1905년 을사늑약 등으로 을사의병·중기의병이 일어났고,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등으로 1907년 국권회복을 목표로 정미의병·후기의병이 일어났다. 전기의병의 주도적 역할은 화서학파가 근간을 이루고 그 창의호국 이념은 양근 벽계의 화서 이항로 선생이 주창한 위정척사였다. 전기의병 중 전국에서 가장 유력했던 의병진은 류인석 대장이 이끈 호좌의진이다. 이는 이춘영·안승우·김백선 의병장 등이 포군 4백여 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창의한 지평의병이 주축이 되었다. 지평의진은 원주·제천 등을 점령하고 단양 장회협에서 승리, 충주성 점령. 수안보·가흥 등지에서 항전하였다. 전기의병으로 일제는 우리나라 침략을 일시 멈추기에 이르렀으며, 호좌의진은 재기를 위해 만주로 가다 파저강변에서 무장 해제되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 인적 기반과 정신적 이념은 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므로 지평은 전기의병의 발상지로 근대 한국독립운동 50년 역사의 시발점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크다. 양근의 이승룡 의병장은 의병 3백 여명을 모집하여 서울 진격을 위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양근의 후기 의병장 권득수 최대현·김춘수·이연년·최대평.조인환 등은 용문산을 근거지로 양근·지평관아 등 관공서와 일본인 가옥 등을 습격하는 등 유격전으로 전공을 세웠다. 전국의병은 연합의진 결성을 위해 이인영 대장 휘하에 양동으로 5천여 명이 집결하였으며, 이를 해산시키려는 일본과 삼산리 등에서 격전을 벌여 큰 타격을 입혔다. 이 결과로 다음 해 13도창의군 일만여 명이 양주에서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말 전후기의병의 요람인 양근과 지평이 통합되어 양평군이 되었으니, 양평의병으로 정립함이 마땅하다. 혼란한 세태에서 문헌이 잔결되어 양평의병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2천여 분을 모두 찾아 기록하지 못함은 안타까운 일이다. 광복 칠십주년 및 을미의병 창의 백이십주년에 즈음하여 양평의병의 대강을 요약하고 밝혀낸 의병 이백여 분의 성명을 돌에 새겨 세우고 추모하며 숭고한 창의호국정신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고자 한다. 단기 4348년, 서기 2015년 을미 11월 28일 양평의병기념사업회 회장 신교중 근찬, 한산후인 지봉 이정복 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