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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기 '위정척사; 네 글자는 "정학을 수호하고 사학을 배척한다"는 뜻과 "정도를 지키고 사도을 척결한다"는 도학적인 의리사상이다. 이는 조선말기 내부적 모순과 외세 침입의 위기의식 속에서 현실극복의 대응논리로 유림사회가 공유했던 민족주체의식이다. 그 대표적 선비는 문경공 화서 이항로선생이다. 18~19세기 국내외적으로 거센 파도를 만나자 나라의 위급함을 느낀 전국의 선비들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상소로써 간언하였으니, 1866년 노사 기정진, 화서 이선생의 병인 척사상소이다. 그해 병인양요가 있었고, 1871년 신미양요가 있었다. 1876년 면암 최익현의 병자지부상소, 1881년 이만손, 홍재학의 신사척소상소, 1882 백낙관의 남산 봉화불 사건등 척사운동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선비들이 눈물을 흘리며 붓이 닳도록 상소하고 입이 마르도록 간언하였으나 도리어 유배되거나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마침내 성벽은 무너지고 피비린내가 진동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1895(을미) 화서학파는 용문산에서 의병봉기를 논의했다. 그해 양동에서 이춘영, 안승우 의사가 의병을 일으키자 이어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그 중심에는 의암 류인석대장을 비롯하여 대개 화서연원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백성은 나라의 위급함을 당해서 나라의 명렬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충신과 역적을 가려내고 효자와 도적을 구분하여 난신적자를 처단하는 것이 위정척사의 정당한 논리였고 그 대책은 내수외양이었다. 백성이 무도한 침략자인 외세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저항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국가존망의 위급함을 당하였을 때에 나타나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이는 자발적으로 나서서 침략해오는 외적을 물리쳐 나라의 안정과 질서를 회복하고 평화를 유지하자는 애국애족정신의 실천이었다. 이 위정척사사상은 의병항쟁은 민족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조국광복의 초석이 되었다. 위정척사사상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수호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위한 민족주의사상이다. 이것이 위정착사비를 세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서학회 이종익 이사장이 다년간 화서학회의 학술사업을 지원하여왔다. 이제 그 부인 이영옥여가사 화서선생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종립감사에게 화서선생의 역사관이 담긴 '송원화동사합편강목'에서 '위정척사' 네 글자의 집자를 부탁하여 돌에 새겨 세운다. 지금의 시대는 정과 사를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상황이지만 위정척사는 조국과 민족을 수호하고 계속성을 유지하는 구국정신이니 애국애족정신으로 승화시켜 길이 계승 발전시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