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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군 양동면은 대한민국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예부터 예를 숭상하고 충효를 실천하며 산자수명하고 인심 또한 후하여 복받은 땅으로 살기좋은 고장이다. 일제의 침략야욕이 노골적이던 1895년(을미년) 일본의 자객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일제에 맞서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양동출신의 이춘영, 안승우 두 의병장과 청운면 출신의 김백선 의병장이 중심이 되어 창의 출병하여 후에 호좌의진의 중추를 이룬다. 이를 을미의병, 지평의병 또는 전기의병이라고 하는데 개항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 봉기로서 의병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효시가 됐고 후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으니 호국의 땅으로 의향의 고장이기도 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우리나라는 명목상으로는 보호국이라고 했으나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는 한일신협약과 기유각서 등이 이완용의 매국 내각과 일본의 한국통감부 사이에 체결되어, 국권을 점차적으로 침탈해갔다. 그리고 종국에는 1910년에 한일합병조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멸망했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의병과 민중봉기가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일어나 끈질기게 이어졌다. 1919년(기미년)에는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포의 영향을 받아 서울에서 3.1운동이 발발하여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양동에서는 전석현, 이종성 공이 통문을 돌려 동지를 규합하여 1919년 4월 7일, 양동면사무소 광장에 많은 면민과 인근 타면 사람들이 모여 전석현공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종성공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여 모두 외치니 사기가 충천하고 천지가 진동하였다. 참여한 군중이 호응하여 시가지를 돌아 양평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행진하자 남녀노소 할것 없이 나와 힘을 합하니 그 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양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기마헌병이 출동하여 무자비하게 총칼을 휘둘러 강제로 해산시킴에 따라 사상자가 다수이고 체포된 사람 또한 수십 명이었다. 이 독립만세운동으로 주도자인 전석현, 이종성공은 경성지방 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했으며, 선도자인 이종철, 심원각, 이섭, 박철현, 정호철, 박성근, 이백석, 이성섭 공은 태형 90대로 사경이 되어 방면되고 그 외에는 가담 정도에 따라 수십 명이 태형 60대에서 30대로 방면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거나 다친 분들은 물론 태형을 받고 방면된 나머지 분들의 성명마저 알 길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양동기미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선인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며, 사생취의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세우다. 2013년 11월 양동역사만들기 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