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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발상지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양평의병묘역아래 사이실 355번지 집터(301평)는 퇴앙 안종응, 하사 안승우, 우하 안기영 3대가 출생하여 세거한 곳으로 '을미의병' 발상지이다. 양동은 당시 지평현 상동면이었으므로 '지평의병'이라고도 한다.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한국을 병탄하려고 국권을 농락하더니, 마침내 1895년(乙未) 우리나라의 중전 민 황후를 학살하고 단발령을 강제로 실시하는 등 우리 조국과 민족을 강점하여 식민지화하려는 야만성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에 의분을 참지 못한 퇴앙이 동지들과 거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하사의 친우인 석곡리 목골출신 괴은 이춘영 의사가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찾아와 퇴앙과 계책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괴은은 청운면으로 가서 김백선 의사를 만나 거의하기로 하고 의병 400명을 모집하여 원주 안창으로 집결시켰다. 퇴앙은 제천에 있는 하사에게 명하기를,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의암 류인석 선생에게 의병참여와 계책을 문의하여 안창으로 오라고 하였다. 하사가 명을 수행하여 일행과 함께 안창 만수암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이춘영ㆍ김백선ㆍ 김사정 여러 의사와 더불어 창의 호국투쟁을 결의하고 음력 11월 28일 안창역에서 장수 괴은 이춘영이 단상에 올라 깃발을 높이 드니, 전국에서 가장 먼저였다. 의병진은 원주를 점령하고 제천으로 진격하여 류인석 선생을 대장에 추대하였다. 류인석 대장은 의병진을 재편하고 장기항전에 들어가 연합의진으로 발전하여 충주성을 빼앗으려고 항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류인석 선생은 재기를 꿈꾸며 의병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갔으나 1896년 음력 7월 31일 회인현 사첨자 파저강변에서 창의 8개월 만에 무장해제 되어 해산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가장 방대하고 가장 치열하고 가장 장기화된 항쟁으로, 독립투쟁으로 이어졌다. 이상으로 보면 양동면 석곡리 355번지 집터는 화서학파가 위정척사 사상을 기반으로 창의 호국투쟁을 처음 논의한 곳이다. 이는 한국근대항일민족운동 50년사의 시발점이라는 데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것이다. 결론적으로 양평군 양동면은 명실상부한 1895년 을미의병(지평의병)의 발상지였다. 양평문화원 양동분원의 요청으로 2011년 봄에 짓는다. 지은이: 독립기념관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김호일 / 경기향토문화연구소연구위원 / 전 경원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장삼현 / 세운이:양평군 양동면 양평문화원 양동분원 / 세운날:단기4345년 서기2012년 임진 10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