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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논문이 나오자 선생은 몹시 분개하여 전국유림 및 후손들과 함께 엄중히 성토하였다. 벽계강당을 지어 화옹의 유지를 받들고 기념관을 지어 화옹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주선하여 역시 성사시켰다. 벽계마을에 화옹의 발길이 닿은 곳이면 어디든 봉심하고 수호하여 노산팔경과 벽계구곡을 명명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이 일주암 분설담 제월대 명옥정 등을 알게 된 것 또한 선생의 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벽계구곡 일대의 기암괴석을 탐석업자가 불법탐취하려 하자 가족과 주민을 동원하여 반출을 중단시킴으로써 화옹의 유적지를 보호하기도 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화옹의 문인과 연원이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데 이를 정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삼남 삼현에게 명하여 벽계연원록을 편찬하게 하고 노산사의 연혁을 엮어 노산사를 편찬하게 하니, 선생의 지도가 아니었으면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선생은 부모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멀리 상조에 이르기까지 사모하는 마음을 지극히 하여 정성을 기울이지 않음이 없어서 존현하는 일 뿐만 아니라 친친하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선생이 향년 87세로 병술(2006)년 7월 초4일 벽계정침에서 세상을 떠나니 온주민이 애도하여 회장한 자가 일찍이 수백명이었다. 선생의 학문은 소학과 사서를 위주하고 주자 우암화서 삼선생을 지극히 존경하였다. 누구와 대담할 때나 자녀를 훈계할 때에는 항상 화옹의 도학과 의리를 강조하였다. 선생은 집에서는 엄숙하고 밖에서는 인자하여 항상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덕이 있었다. 서양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을 지켜 일평생 아관박대로 의관을 바르게 하였으며 성경현전으로 심성을 다스렸다. 어느덧 선생이 노산사를 세우기 시작한 지 회갑이 넘었다. 이번에 도유사 박세빈씨가 선생의 공적이 전해지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기고 또한 화옹의 후사가 어느 정도 성취되어 구택과 노산사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영구히 보될 수 있게 된 것이 모두 선생의 공이니만큼 문화재터 한쪽에 비를 세워 후인들의 본보기로 삼자고 발의하였는데 뭇 의론이 한결 같았다. 삼현이 선생의 약력을 적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