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page


185page

보헌 장기덕 선생 공적비명 고종 5년 무진(1868년) 3월 18일 화서 이문경공이 벽계에서 역책하시고 그로부터 35년 후 그 문인 면암 최공 익현 등이 모여 강수계를 조직하고 영당 건립, 문집 간행, 구도 환퇴, 신도비 수립 등 후사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세상변고가 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더니, 100여 년이 지나서야 그 절목들이 대강 성취되었는데 여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앞뒤에서 물심양면으로 온갖 노력을 다한 분이 있었으니 바로 화옹의 미생인 보헌 장선생이다. 선생의 휘는 기덕이요 자는 공온이며 관은 결성이니, 화옹의 제자이며 맏사위였던 동우공 회진의 현손이요 장암공 용환의 아들이다. 경신(1920)년 12월 10일 벽계에서 출생하니 그 집이 화옹의 구택 오른쪽에 있었다. 어려서부터 부친 장암공에게 유염한 바가 오직 화옹이었으니 선생이 화옹을 존모하게 된 것은 대개 그 유래가 장암공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선생은 양서 박공 준빈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사위가 되었는데, 이로부터 화옹이 공자 주자 주자의 도통을 계승한 천지간 주인이심을 확신하여 존모하고 학함을 더욱 지극히 하였다. 항상 화옹전집을 높이 모셔놓고 송념하였는데 특히 아언에 대하여는 평생 읽고 외우기를 반복하여 그치지 않았다. 선생은 계미(1943)년에 평안도 선비들과 협력하여 화옹묘소에 석물을 설치하고 절사위토와 화옹의 부친 우록헌공의 묘역을 되물림에 큰 공헌을 하였다. 경인(1950)년에는 노산사 건립에 뜻을 두고 유림의 협조를 얻어 일을 시작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중단하였다가 4년 뒤 갑오(1954)년에 준공하였다. 화옹 후손 우필씨가 모셔오던 주자 우암 화서 삼선생 영정을 봉안하고 선생이 또 위토를 기증하여 매년 9월 14일 제향하도록 하였다. 그후 삼선생 영정을 환봉하는 일이 발생자 다시 모사하여 분향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