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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지혜와 힘이 미치지 못하여 하지 못하고 있는데, 虛名을 잘못 입고 이 지경을 만났으니 실로 깊이 부끄럽다.” 고 말하고 즉시 胤子 俊學에게 명하여 행리를 꾸리게 한 다음 家廟에 뵙고 출발하였다. 이윽고 정혁선과 대질하게 되었는데, 선생이 정색하고 정혁선을 보며 말씀하기를 “의병이 얼마나 좋은 일인데 쇠하고 병든 나에게 그 이름을 얹는가? 이는 진실로 늘그막의 영광이다. 그러나 천하의 일은 있는 것을 속여 없다고 할 수 없는데, 무슨 증거나 꼬투리가 있는가?” 하니, 정혁선이 상심하여 답변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출발하여 站門 밖에 나와서 개연 히 눈물을 흘렸는데, 이는 重菴선생이 禁府에서 형벌을 받을 때 눈물 흘렸던 그 마음이었다. 庚戌年 가을 국가에 큰 변고가 있었다. 恩賜金이라 칭탁하여 나라 안 연로한 이들에게 돈을 골고루 보냈는데, 이때 선생의 나이가 71세였다. 선생이 엄한 말로 물리쳐 말씀하기를, “李根元은 조선의 가난한 선비로 스스로 天地間 逸民이라 칭하고 있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道가 있는 스승을 뵈어 尊華攘夷의 의리와 克己復禮의 학설을 강론하였으나, 힘써 행하지 못하고 아는 것 없이 늙기만 하였다. 지금 일본이 남의 임금을 폐지하고 남의 나라를 삼키고서 그 돈을 그 백성들에게 나눠 주고 있으니 그 백성된 자가 편히 받으려 해야 하겠는가! 내 나라의 임금이 하사하는 것이 있어도 의리에 옳지 않고 마음에 편치 않은 바가 있으며 억지로 받을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이를 벗어나 절대로 받을 만한 의리가 없는 경우에 있어서이겠는가? 이것이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받지 않는 이유이다.” 하였다. 뒤이어 위협과 협박을 당하고 두 차례 지평 감옥에 구금되었으니, 선생이 감옥에 갇혀 있던 날은 모두 7일이었다. 누차 곤욕을 겪어 자못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는데, 늠름히 犯接할 수 없는 節義가 있었다. 이때 다음과 같은 箴을 지었다. “일본이 주는 금은 결코 받을 수 없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의리는 우주에 영원하네. 한 개도 취하지 않으니 마음이 金石처럼 단단하네, 이렇게 하는 것은 秉彛好德의 마음일 뿐이네” 아! 선생은 斯道가 매우 쇠하는 때를 당하여 곤액에 빠져 生死를 넘나들면서도 굳은 지조가 끝까지 변치 않았으니, 그 융성한 덕망과 빛나는 광채가 족히 陽德을 기르고 道?을 연장할 만하여 우뚝이 당세의 스승이 되었다. 가정에 있어서는 매일 동틀녘에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하고 의관을 갖춘 다음 家廟에 절하고 五賢影堂에 다녀왔는데, 精舍 동쪽에 一直堂을 건립하여 朱子를 봉안하고 尤菴ㆍ華西ㆍ重菴ㆍ省齋를 配享하여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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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와서는 집안 사람들을 인솔하여 家禮와 小學 몇 조목을 읽게 한 다음 揖禮를 행하고 書室로 나가 諸生들과 講論하였는데 날마다 한결같았다. 선생의 제자들이 수백 명이었는데 道學과 節義를 다반사로 삼아 김상태 김태원 안승우 이규현 장익환 등은 擧義함으로써 斯道를 부지하고 박준빈 배진환 천낙귀 최형근 추성구 등은 講學함으로써 斯道를 부지하여 당시의 元氣가 선생 문하에 집합하여 있었다. 어버이가 살아 계실 적에 뜻을 받드는 효도와 봉양하는 정성에 모두 그 자식된 직분을 제대로 하였으며 戊寅年에 老稼堂의 喪을 당하고 壬午年에 어머니 李氏의 喪을 당해서는 예절과 슬픔이 모두 극진하였다. 婣戚과 친목하고 孤幼를 撫恤하여 자손에게는 의로써 가르치고 부인에게는 예로써 거느렸으며, 일상생활의 집기들은 한결같이 검소하고 소박한 것으로 하고 서양이나 왜놈의 물건을 사용하지 않았다.사람을 접대함에 있어서는 和順함이 안에 쌓여 英華가 밖에 드러났다. 그 溫厚卑謙한 뜻과 至誠愛好의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고 말씀에 나타나 일찍이 모나거나 차별하는 것이 있지 않았다. 정성으로 道를 강론하고 부지런히 鄕飮禮를 행함에 있어서는 長潭 雲潭 朝宗巖 大老祠에 두루 다녀왔으며, 벗들과 從遊하는 곳에는 1년에 서너 번이거나 한 달에 한두 번씩 만나 위로는 父師의 뜻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後進들의 기대가 되어 힘쓰고 힘써 게을리 하지 않아 연세가 높아져서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山水를 사랑하여 노래하고 읊조리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精舍 남쪽에 작은 연못을 파고 또 그 서쪽에 反招臺를 쌓아 봄바람이 화창할 때와 가을달이 밝을 때 큰 갓과 넓은 띠로 흰머리에 청여장을 짚고 그 사이에서 노닐었는데 어떤 때는 술자리를 열고 어떤 때는 시를 짓기도 하였는 바 훌쩍 세상 시름을 벗어난 기상이 있고 편안히 천명을 즐기는 뜻이 있었다. 著書에는 錦溪集 九冊이 있다. 일찍이 말씀하기를, “學問 全?와 春秋大用을 우리나라 선배 중에 오직 尤翁만이 당할 수 있는데 다만 大全의 卷數가 매우 많아 독자들이 쉽게 터득하지 못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고 하고, 그 절실하고 요긴한 내용을 뽑아 분류하여 十數篇을 만들고 宋子書節略이라 이름하였다. 戊午年 2월 8일 丙寅日에 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날 저녁에 氣貌가 평소 같고 글 읽는 소리도 평상시 같았다. 이때 從姪 時學이 모시고 앉았었는데, 선생이 말씀하기를, “사람의 몸을 주장하는 것은 마음이니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直만한 것이 없다. 마음이 곧지 않으면 마음이 될 수 없으며 사람이 사람이 될 수 없다.” 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문안하였더니 눈을 감고 말씀이 없었는데 申時에 이르러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喪禮를 집행함에는 四禮便覽에 의거하여 했으며 士林葬을 행하였다. 묘소는 深谷의 先塋 오른쪽 등성이 艮坐原이다. 아! 先生의 盛德과 宏學은 본디 세상이 큰 쓰임이 있을 만한 것이었으나 다만 좋지 못한 시기를 만나 초야에서 자취를 감추고 華西 重菴 省齋 三先生의 遺緖를 結梢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扶持하지 않음으로써 扶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