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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문 무릇 氣數는 때때로 屈伸함이 있고 斯道는 이에 따라 盛衰한다. 氣數가 펴져서 斯道가 盛하게 되면 하늘이 반드시 大聖賢을 내어 사도를 크게 행하여 당시를 다스리게 하고 기수가 굴하여 사도가 쇠하게 되면 하늘이 또 大聖賢을 내어 이 어지러움을 고식시켜 후세를 기다리게 하는데, 이는 모두 仁天이 인간을 매우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蔑貞의 시기를 당했을 때 華西 李文敬公이 蘗溪에 태어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때 한때의 儒賢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는데, 金重菴 平黙과 柳省齋 重敎 두 선생은 특히 그 현저한 분들이다. 처음에 화서 선생을 섬기고 나중에는 두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그 전수하는 바를 다 얻어 우뚝히 洪流의 砥柱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錦溪 李先生이라고 칭하는 분이 바로 그 사람이다. 선생의 諱는 根元이요, 初諱는 世元이다. 字는 文仲이요, 號는 坯墣窩이다. 憲宗, 六年 庚子 十一月 十二日에 砥平縣 錦里第에서 태어나니 학자들이 그 거처하는 곳을 따라 錦溪先生이라 칭하였다. 李氏家系가 璿源에서 나왔으니 成宗大王 第十一子 全城君 諱 忭, 諡號 文肅公이 十一世祖가 된다. 考의 諱는 養翕이요, 號는 老稼堂이니, 重菴 金先生이 행장을 지은 바 있으며, 妣는 全義 李氏 應培의 따님이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귀 옆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었으며 목소리가 우렁차고 용모가 걸출하여 사람들이 큰 그릇이 될 인물로 중히 여겼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학업 닦기를 열심히 하여 남이 한 번하면 나는 백번 하고야 마는 공부를 하였다. 弱冠에 부모의 명에 따라 과거공부를 하여 크게 명성이 났었으나, 과거공부는 선생의 뜻이 아니었다. 나이 27세에 華西李先生을 벽계로 찾아가 뵈었다. 이에 性理의 要體와 道義의 대단함을 듣고 主理의 학문을 힘써 강하고 春秋의 의리를 엄히 밝혔는데 화서선생이 ‘仁이 넘쳐난다’고 칭찬하였다. 화서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중암·성재 두 문하에 출입하면서 崔勉菴 益鉉 柳毅菴 麟錫 柳恒窩 重岳 세 君子와 더불어 나란히 달리면서 부지런히 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世道로서 自任하였다. 대개 선생의 학문은 居敬 窮理 力行으로 근본을 삼았는 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사람은 天地의 자식이 되니, 자식 된 자가 감히 天地를 몸받아 이루고 돕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朱子가 이른바 ‘敬에 居하여 그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窮究하여 그 지식을 지극히 하고 힘써 행하여 그 일을 실천해야 한다’고 한 말씀과 栗谷이 이른바 ‘終身事業’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 明德을 論함에 있어서는 “明德은 理이니 하늘이 명하여 나에게 부여한 것이며 내가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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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本?를 말하자면 虛靈洞澈하여 모든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으니, 氣를 떠나지 않되 氣에 구속되지 않으며 능히 사물에 명하되 사물에게 명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만이 홀로 가능하고 사물들은 온전히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으며, 心을 논함에 있어서는 “心은 理氣를 合하고 動靜을 포함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루 유행하여 변화하고 神明하여 헤아릴 수 없으며 眞妄이 일정하지 않고 邪正이 반복되며, 한편으로는 위태하고 한편으로는 은미하며 일정하게 向背하는 바가 없다. 聖人이 이를 근심하여 특별히 惟精惟一의 가르침을 베풀어 학자들의 萬世傳心의 요령으로 삼게 한 것이다. 眞妄이 일정치 않은 것에는 理와 氣가 합한 것이 心의 當?地頭임을 알아 惟精의 공부를 하고, 바르고 사특함이 없는 것에는 理가 氣의 주가 되는 것이 心의 本體面目임을 보아 惟一의 공부를 해야 하니, 이것이 心學主理의 宗旨이다.” 하였으며, 華夷의 大防을 논함에 있어서는 “尊華攘夷는 天地의 큰 법이며 古今의 공통된 의리이다. 陰陽으로 말하자면 陰을 억제하고 陽을 부지하는 것이며, 人獸로 말하자면 인간을 귀하게 여기고 짐승을 천시하는 것이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말하자면 사사로움을 극복하고 禮로 회복하는 것이며 욕심을 막고 天理를 보존하는 것이니, 이것이 모두 그 의리이다.” 하였으며, 出處를 논함에 있어서는 “士君子의 出處?語?은 時運의 盛衰와 관련이 있으니, 事爲의 大小輕重이 시대를 인하지 않음이 없어 의리가 자연히 같지 않은 법이다. 크게 행할 뜻이 있고 크게 행할 만한 세상을 만나면 은거하지 말고 세상에 나아가며 잠자코 있지 말고 말하며 그 임금을 堯舜처럼 만들고 그 백성에게 은택을 내리는 것이 본디 君子가 즐거이 하는 것이다. 설령 국가의 운명이 곤란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게 되더라도 君子는 愛君憂國 至誠惻?의 마음을 갖고 서둘러 구제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하였다. 이러한 말씀들은 선생의 학문의 淵源이 유래가 있고 평소에 充養함이 있었기 때문이니, 道學의 대단함과 尊華攘夷의 엄정함과 出處의 관점을 또한 미루어 볼 수 있는 것이다. 乙未事變을 당하여 島倭가 우리 國賊들과 더불어 國政을 제멋대로 하여 斷髮의 화가 위로 大內에서부터 閭里에 까지 미쳤으며 뒤이어 國母를 시해하는 참혹한 일이 있었다. 砥平에 사는 安鍾應 李春永 安承禹 등 선비들이 擧義하고 毅菴 柳先生을 추대하여 首將으로 삼았는데, 선생은 세상에 나가 斯道를 부지하는 것이나, 나가지 않고 부지하는 것이 같은 의리라고 여겨 의암에게 편지를 보내 몸이 병들어 나가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이듬해 병오년 정월에 일진회 사람 鄭赫善이 선생을 무함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일진회를 해치고 보름 후에 의병을 출동시키려 한다.’고 하였는데, 일진회는 바로 島倭의 走狗들의 소굴이다. 이리하여 驪邑兵站에서 선생을 소환하니, 선생은“擧義는 오늘날의 당연한 일이다.